사실을 감추고 싶은 사람들. / 눅 4:14-30.
묵상자료 4351호 (2013. 4. 15. 월요일).
시편 시 84:9-12.
찬송 341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김승희 시인의 <풍선껌 권하는 세상>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 가고 싶은 곳/ 언제나 붉은 신호등이 걸려 있지/ 언제나 붉은 신호등이 청천 하늘에 수렁처럼 걸려 있어/ 길은 많으나 갈 수 없고/ 자유는 많으나 통행금지에 자유만 유효한 곳” 그럴 때가 있습니다. 꼭 내 앞에서만 걸리는 붉은 신호등, 빨리 가고 싶은데 꼭 가고 싶은 데, 건널 목 저편에서 붉은 손바닥이 안 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번번이 내가 가는 길목에서만 안 돼. 처음엔 오늘 하루의 운수 탓을 하다가, 나중에는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희망은 만우절과 같은 것이라고/ 기다림은 어정어정 돌아다니면서/ 질겅질겅 풍성 껌이나 씹고/ 1년에 365일 날이면 날마다 만우절 아닌 날이 없어” 한 마디로 꽉 막힌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을 만나다 보면 별의 별 생각이 다 나지요. 더 이상 만우절 같은 희망을 기다릴게 아니라, 붉은 신호등 무시하고 가고 싶은 데로 마구 내달릴까 싶어집니다. 하지만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도로 교통법 위반에 걸린다면 귀찮을 거야/ 차가운 네온의 붉은 피를 온 몸에 뒤집어쓰고/ 백로는 검다 까마귀는 희다/ 기초 소양교육까지 받아가면서/ 죄인의 표식으로 영영 어떻게 살까” 앞뒤로 꽉 막혀있는 지금의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변칙을 써야 할까 잠시 망설입니다. 한번이 어렵지 두 번이 뭐 어려울까요? 두어 번 눈 질끈 감고 나면, 백로는 검다 까마귀는 희다, 그것이 기초 소양이라고 자연스럽게 노래 부르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는 동안 누구라도 빠질 수 있는 이 함정,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 [댄스 댄스 댄스]에서, 이런 조언을 들려줍니다. “나는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하지만 어떻게 하면 좋은 지를 나는 알고 있다. 아무튼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 어떤 일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다. 수가 막혔을 때에는 당황하여 움직일 필요는 없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무슨 일리 일어난다. 무슨 일이 다가온다. 가만히 응시하면서 어스름 속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이기 시작하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나는 경험을 통해 일을 배웠다. 이는 언젠가는 반드시 움직인다. 만일 이것이 필요한 것이면, 이는 반드시 움직인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3년 3월 15일 방송>
2. 오늘 본문은 나사렛 회당에서 하신 설교와 그에 따른 일화입니다. 종종 예수님을 호칭할 때, “나사렛 예수”라는 별칭을 사용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인간 예수이심을 강조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30년을 한 목수로써 사셨던 주님께서 고향의 회당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날의 페리카피(성구집)에 따라 이사야 61:2을 읽으신 후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는 요지의 설교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인 회중과 대담을 하셨고, 그들은 주님께서 가버나움에서 행하셨던 기적들을 해 보라고 청합니다.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신 일들이며,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일과 오병이어 사건 등을 염두에 둔 주문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에게 엘리야 시대의 일화들을 꺼내십니다. 3년 6개월 비오지 않은 때에 시돈 땅 사렙다 과부의 집을 구원한 일과, 엘리사 시대에 많은 문둥이들 중 유독 수리아 사람 나아만에게만 고침을 받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제쳐두고, 이방인으로 홀대받던 사람들이 은총을 입은 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잠자코 듣기에는 너무 화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동네 밖 낭떨어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했습니다. 주님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분노하였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는가를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입니다. 모든 백성이 다 굶주려도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은 먹여주셔야 하며, 모든 문둥병자들에 우선해서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만은 깨끗이 고치셔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고 하니 말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과거의 역사적 사건들을 그대로 떠올렸을 뿐입니다. 역사적 사실이 바뀌지 않는 한 이를 회상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위험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역사적 사실과 자존심, 지금 우리들이 풀어야 할 현실인지 모르겠습니다. 9.11 사태와 이라크 침공, 독도와 센카쿠 열도에 대한 주변국들의 첨예한 대립을 자존심의 문제로 접근해서는 안 될 이유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