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모든 질병은 주님께서 고치실 수 있습니다. / 눅 4:38-44.

박성완 2019. 5. 19. 01:15

묵상자료 4353(2013. 4. 17. 수요일).

시편 시 85:3-6.

찬송 53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밥이 코로 들어갔는지 입으로 들어갔는지 모르겠다는 말이 절로 나올 때가 있습니다. 식사를 하는 주변 환경이 지나치게 소란스러울 때인데요. 그런데 그렇게 시끄럽고 분주한 환경에서 식사를 하고 나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맛으로 먹었는지 모르겠다는 거지요. 심지어 맛없다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소음과 맛은 연관이 있을까요? 영국 멘체스터대 앤디우드 교수에 따르면, 소음이 늘수록 사람들은 음식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드 교수는 48명의 실험자에게 비스킷이나 감자칩 같은 맛있는 음식을 주고, 헤드폰을 쓰게 한 다음에 소리에 따라서 맛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지 실험을 했는데요. 결과는 놀라왔습니다. 실험자들은 소리가 커질수록 단 맛이나 짠맛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주위가 분산됐기 때문이지요. 이 같은 결과는 식당음식이 왜 단맛이나 짠맛 등이 강한지에 대한 설명도 될 수 있습니다. 시끌벅적한 식당에서는 맛이 강하지 않으면, 맛이 없다고 느낄 가능성이 많으니까요. 더구나 식당의 소음은 점점 커지는 추세에 있지요. 이건 최근에 유행하는 인테리어와 연관이 있습니다. 장식 없는 넓고 텅 빈 공간에 콘크리트 바닥과 천장은 음악소리와 사람들의 대화를 그대로 반사해서 전체 공간에 울려 퍼지게 하는 효과를 내기 때문입니다. 그 소음의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가하면, 음악을 틀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들의 대화만으로도 평균 88데시빌 정도 이상이 나오는데요. 기차가 길에서 100m 떨어진 곳에서 기차 소리를 들었을 때 소음이 85데시빌 이라고 하니까, 기찻길 옆에서 식사를 하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음악까지 나온다고 하면, 우리가 얼마나 커다란 소음 속에서 식사를 하는지 실감이 납니다. 소음수치가 높으면 당연히 인체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줍니다. 일단은 큰 소리로 말해야 하니까 후두염에 걸릴 확률이 높아지고요. 두통이나 불안 초조함 불면을 일으킬 수 있고, 심혈관계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소음이 없어도 문제라고 해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는, 감각의 혼란이 생겨서 45분 이상 버티기 힘들고요.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할 때는 조용한 공간보다 70데시빌 정도의 소음이 좋은데, 커피숍에서 트는 음악 소리가 그 정도라고 합니다. 소음, 사람 사는 곳이라면 으레 나는 정도의 소리, 그 정도라면 좋을 텐데 말이지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3313일 방송>

 

2. 그 흔한  감기 몸살에도 손발은 물론 온 몸이 묶여버려 바보처럼 돼 버리는데, 하물며 수많은 날들을 언제 나을지 모르는 질병에 붙들린 사람들이야, 얼마나 힘들고 두려운 삶이 될까요? 주님이 찾아오신 세상은 문자 그대로 병든 세상입니다. 육신의 질병 뿐 아니라, 마음의 병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찾으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실 때, 주님은 민망하셨다는 심기를 내비치셨습니다. 요즘 용어는 아닙니다만, 민망하다는 말은 당황스럽게 하다.” 또는 불쌍히 여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 이런 질병들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 어긋난 일이며, 있어서는 안 될 비정상적인 일이라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건강하고 활기차게 살아야 할 사람이 질병의 노예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실 때 주님은 당황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님의 시각과는 달리 우리들 처지에서 생각해 보면, 질병의 순기능(?) 중 하나는 인간의 약함과 겸손의 필요성을 가르치는 효과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의 죄인 됨을 확실하게 짚어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잃은 것보다는 오히려 얻은 게 더 많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손을 얹어서 고쳐주시기도 하시고, 귀신들린 사람들에게는 빨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는 식으로 꾸중을 하심으로 고쳐주셨습니다. 지금도 이런 방식으로 병자를 대하는 종교인들이 많습니다. 무당들이 그렇고, 그에 버금가라면 서러워할 분들이 기독교 안에도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권위를 빌려서 하는 일이긴 합니다만, 자칫 오해받을 소지도 많은 것 같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깨끗해져라!” 라고 할 때, 충분히 성경적일 수 있지만 말입니다. 저의 생각은 질병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분께 의뢰하는 것이 오히려 정당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병자의 바른 신앙을 위해서 그렇고, 다음은 그 병자를 돕는 자신의 바른 신앙을 위해서 그렇습니다. 건강한 신앙은 그 주체가 주님이시라는 것 외에 다름이 아닌 때문입니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오늘의 묵상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