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4. 21. 부활절 넷째 주일] 소통과 불통의 함수관계. / 요 10:22-30.
묵상자료 4357호.
시편 시 86:6-10.
찬송 489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내와 시집간 딸의 통화는 길었습니다. 옆에서 듣자하니 특별한 내용도 없습니다. 심지어 두 사람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연예인이야기며 드라마이야기가 한참 이어집니다. 나중에 집에 놀러온 딸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엄마하고 매일 무슨 통화가 그렇게 기니?” 딸이 말했습니다. “그냥 요.” 그냥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을까요. 그것도 매일. 한마디 해 주었습니다. “전화는 용건만 간단히 하는 거라.” 고. 딸은 가타부타 답이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둘은 자기 몰래 계속 길게 통화하는 것 같습니다. 맹물처럼 싱거운 말, 그냥. 그러나 누군가 그냥 이라고 말한다면, 36.5도의 따뜻한 체온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줄 수 있는 것이 단지 그 뿐일 때가 많습니다. 그냥 어깨에 손을 얹어주면 되는데, 그걸 못해서 얼마나 관계들이 파국에 이를까요? 사람과 사람사이에 용건만 간단히는 금물. 목적 없는 순수함으로 그냥 주고받는 말들, 그냥 함께 한 시간들이 쌓여서 친밀해지고 깊어집니다. 그냥 좋은 것이 정말 좋은 것입니다.<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3년 4월 8일 방송>
2. 같은 삶의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남북 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의 얘기이며, 우리 믿는 자들 사이의 얘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같은 말은 하지만, 뜻이 통하지 않는 세상(22-24절).
관계의 철학자 마틴 부버는 인격적 관계인 <나 너의 관계>와 비인격적 관계인 <나 그것의 관계>를 얘기한바 있습니다. 분명 나와 너는 인격적인 존재이며, 그래서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소통의 세상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론의 대가마저도 정복자로 팔레스타인에 왔을 때, 비인격자로 돌변해서 한 인격자의 저택을 비인격적으로 가로채고 말았다고 합니다. 머리로는 인격적 관계의 소통을 말하지만, 가슴은 비인격적 불통의 삶을 살았다는 뜻이 됩니다. 인격적 관계란 같은 말에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뜻이 통해야 했습니다. 타인을 마음에 두고 배려하는 뜻이 없을 때, 대화는 한낱 소음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제우스의 신전으로 바뀌었던 성전을 회복한 후 지키는 명절인 수전절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정체성 때문에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기다리는 메시야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모든 불통에는 관계의 진정성이 없어서(25-30절).
유대인과 예수님 사이의 간격은 가깝고도 멀었습니다. 어느 시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가 멀리 떨어져 있으면 불행하다고 말했습니다. 머리와 가슴이 따로 놀 때를 비유한 것입니다. 주님은 단호하게 불통의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목자가 일어서면 따라 일어서고, 앞으로 가면 따라 가고, 멈추면 따라 멈추는 관계. 사는 것과 죽는 것을 함께 하기로 한 관계입니다. 말로는 함께 먹고 마시자고 하지만, 운명공동체라고 눈물까지 흘리며 호소를 하지만, 그게 거짓부리인 것을 알면서 계속 속아온 우리들의 관계입니다. 서류상의 관계나 의무감에서 어쩔 수 없이 유지하는 관계가 아니라, 진심으로 상대를 생각하고 염려하고 배려하는 인격적 관계가 필요합니다. 주님은 그것을 목자와 양의 관계라고 정의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목자는 누구입니까?
주님을 바라보며 함께 손을 잡아야(요 17:20-21).
신앙생활이란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주님을 바라보는 일보다 더 순수하고 아름다운 신앙생활이란 없습니다. 주님을 바라보기 위해서 성경을 읽고, 예배에 참석하고,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관계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함수관계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성금요일에는 회중들에게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권하는 순서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함께 바라보는 것, 주님의 말씀을 함께 듣는 일, 주님을 향해 함께 찬송을 부르는 일은, 불통에서 소통으로 가는 가장 확실한 지름길입니다. 자식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그리 해야 합니다. 남편을 믿어야 합니다. 주 안에서 하고, 지도자를 믿어야 합니다. 주 안에서 말입니다. 주님을 함께 바라보는 일이 없이는 소통보다는 불통이 우리를 괴롭힐 것입니다. 주 안에서 소통하는 은총이 우리와, 온 누리에 가득하길 빕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