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랬을까? / 눅 7:36-50.
묵상자료 4365호 (2013. 4. 29. 월요일).
시편 시 88:11-13.
찬송 410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길거리에서 비스킷을 먹다가, 그만 한 개가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비둘기 두 마리가 날아와서 번갈아가며 쪼아댑니다. 하지만 커다란 비스킷은 쉽게 부셔지지 않았고, 그래서 그들의 힘으로는 먹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나는 먹을 수 없는 것 하면서, 비스킷을 발로 밟아서 잘게 부셔주었습니다. 둘이서 사이좋게 나눠 먹을 줄 알았는데, 이게 웬일일까요? 덩치 큰 비둘기가 부스러기 위에 두 다리로 떡 버티고 서 버립니다. 덩치 작은 비둘기가 먹을라치면, 홰를 쳐 댑니다. 그 모습 살벌합니다. 일을 벌여놓은 당사자로써, 이런 사태를 그냥 넘길 수는 없었습니다. 내가 먹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너만 먹게 내버려둘 수는 없어 하면서, 작은 비둘기도 한쪽에서 먹을 수 있도록 과자를 넓게 흩어 놨습니다. 그러자 큰 비둘기가 아까보다 날개를 더 크게 펴고선 왔다 갔다 하면서, 작은 비둘기가 이쪽도 저쪽도 다 못 먹게 방해를 합니다. 그렇게 두 마리가 쫓고 쫓기는 사이, 어디선가 제3의 비둘기가 날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비둘기가 마음 놓고 다 먹어치웠습니다. 나눠서 내 것이 적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누지 않아서 나의 것도 적어집니다. 나누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 있습니다. 나누지 않으면 도둑맞는 그런 꿈이 있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3년 4월 25일 방송>
2.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부은 300데나리온(로마 화폐 단위로 1데나리온은 하루 노동자의 품삯정도)을 깨트린 일화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게 회자되곤 합니다. 예수님 앞에서 문제를 제기한 바리새인은, “무슨 짓을 하느냐?” 며 꾸중하기는커녕 하는 대로 두고 보는 예수님을 “진짜 선지자가 아니구나!”라고 마음속으로 생각을 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그걸 팔아 그 값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줄 수 있”는데 라며, 대 놓고 그 여인을 책망하기도 했으니 말입니다(막 14:5). 요즘은 성전을 짓는 일에 옥합을 깨트리라고 주문하기도 하고, 세계 선교를 위해 옥합을 깨트리라고 외치기도 하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이 사건에 대한 주님의 해석은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죄로부터 용서받은 기쁨이 얼마나 크고 귀한지를 말씀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단순히 값비싼 향유를 일순간에 허비해 버리는 어리석음이나, 그 값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를 말하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쩌면 이렇게 다른 이해, 다른 해석이 가능할까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문제를 보는 시각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 라는 본질에 대한 질문보다는, 어떻게 그런 일을? 이라는 현상에 대해서 주목하는 때문입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근본이나 본질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게 된 것 같습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해득실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정치 철이 되면 줄서기에 바쁜 무리들을 바라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본질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훗날 그 일이 얼마나 부끄럽고 한심한 일인지 들어난다고 할지라도, 지금 당장의 이익과 명예를 위해서라면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질문할 내용입니다. 왜 그랬을까? 꼭 그럴 수밖에 다른 이유는 없었을까?
3. 지난 토요일 일본 교회 초청을 받은 저의 교우가 얘기를 했는데, 너무 많은 분들이 제가 일본에 간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뜻이거나, 첫 구절만 읽고 단정해 버리는 성급함이겠지요. 놀라운 것은 박사논문을 쓰는 분도, 예리한 설교를 하시는 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