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내 이웃은 누굴까? / 눅 10:25-37.
묵상자료 4382호 (2013. 5. 16. 목요일).
시편 시 90:10-13.
찬송 438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세 가지 중 첫 번째 것은 큐티클 성분입니다. 큐티클 성분은 달걀 껍질을 코팅하듯 감싸주지요. 위험한 박테리아나 공기의 침입통로를 모두 막아줍니다. 껍질 안쪽에도 그런 보호막이 있습니다. 그건 심지어 두 겹으로 돼 있지요. 또 흰자에도 자체적인 항균 성분이 있습니다. 알을 위협하는 자체 요소도 많지만, 알 스스로 지닌 자체 보호 장치도 철저하게 많은 겁니다. 그러나 정말로 결정적인 출생 대비책이 하나 더 있는데요. 껍질 밑에 작은 공기 주머니입니다. 세상에 나올 때가 된 병아리들은 어느 날부터 안에서 그 공기 주머니를 쪼기 시작하지요. 그러면서 단단한 껍질을 깨고 동시에 공기도 호흡하면서 무사히 껍질 박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물론 아무리 이런 저런 장치가 많아도, 제일 중요한 건 껍질을 부수려는 병아리의 의지이긴 하겠지요. 노력 문득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속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새가 껍질을 깨우고 나오려 한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이젠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로 흔한 명구이긴 합니다. 그래도 병아리들이 온 힘을 다해 껍질 깨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한 봄입니다. 나도 이제 껍질을 깨고 나가야지. 온 힘을 다해 새롭게 맞이하고픈 새로운 세계와 일상을 굳게 다짐해 봅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3년 3월 1일 방송>b.
2. 질문이나 대화가 엉뚱하게 발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 본말이 전도되었다느니 하면서 다시 되돌리는 경향도 없지 않습니다만, 어쩌면 시시한 질문에서 더 중요한 질문으로 발전하는 경우라면 멈춰 설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런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순수하지 못한 의도를 가진 한 율법사가 등장합니다. 그는 시시한 질문을 꺼내들었습니다. “영생을 위해서 뭘 해야 하느냐?”고 물었기 때문입니다. 질문 자체로 보자면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면 상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왜 사는지 알랑가 몰라.” 하는 식입니다. 중요한 데도 불구하고, 말장난처럼 그저 해 보는 말 중의 하나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에서 중요한 물음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 율법사는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는 현실적이고 진지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이웃에 대해서 혼란을 겪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이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서 말할 수 없는 무시와 배신을 경험했다든지, 아니면 역시 사람 속은 알 수 없구나 하는 회의에 빠져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사마리아 사람의 선행>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그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인 자신으로써는 상종 못할 사람으로 거들떠도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 유대인을 도왔다는 것은, 한편으로 부끄럽기도 하고 또 다른 면에서는 놀랍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유대인들에게서 받은 천대를 갚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전혀 사용치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선행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은 선한 사마리아인이고(율법사가 잘 아는 대로), 사마리아인에게는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한 인간이라고(그가 유대인이든 누구이든 상관없이). 그렇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 이웃이 아니고, 나를 향해 애달프게 쳐다보는 그를 향해서 손을 내미는 것,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모두 이웃이라고 말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