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원리. / 눅 16:10-17.
묵상자료 4404호 (2013. 6. 7. 금요일).
시편 시 97:1-4.
찬송 53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새로 장만한 새 신발을 신고 거리에 나서니, 왠지 발걸음도 당당해 지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얼마 못가서 발 뒤꿈치가 쓰라리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맨발로 걷고 싶은 심정마저 돼버렸습니다. 그렇다고 정말로 신발을 벗어던질 수 없는 노릇. 마침 또 다른 신발 가게가 보였습니다. 새 신발을 또 살까 말까 갈등하던 중에, 불현 듯 어디선가 들었던 이 말이 떠올랐어요. “자기 발에 맞으면 그 신발을 신어라. 하지만 발에 맞지 않으면, 미련을 두지 말고 버려라.”
너무나 싫어하는 일에 발목이 잡히거나, 날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은,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아스팔트길을 하염없이 걷는 것과 비슷합니다. 물론 세상에는 끝까지 참고 견뎌서, 내 발을 신발에 맞추는 사람도 적지 않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리석거나 미련해서가 아니라, 그 상황에서 그것이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맞지 낳은 신발을 신고 가는 이 길이, 아프고 눈물겨운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내가 머무를 자리가 아니라면, 떠날 수 있는 용기를 발휘해야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만이 정답일까요? 티베트의 한 스님이 말했습니다. “온 세계를 소가죽으로 덮는다면, 우리는 신발 없이 맨발로 걸어 다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 하지만 우리가 발에 소가죽 신발을 신는다면, 그것은 온 세계를 가죽으로 덮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삶을 바꾸고 싶은데, 외적인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여우처럼 “저건 맛없는 신 포도야!” 하는 것도, 정신건강을 위해서는 나쁘지 않습니다. 적어도 불평불만만 계속하는 것 보다는 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3년 6월 5일 방송>
2. 오늘 본문은 어제 묵상하였던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적용편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당시의 사람들에게나, 오늘의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와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작은 것”과 “큰 것”, “불의한 것”과 “참된 것”, “남의 것”과 “나의 것”을 대립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작은 것에 충성할 때, 큰 것에도 충성하는 것이며, 불의한 것에 열심할 때 참 된 것에도 열심하는 것이며, 남의 것에 신중하고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자기 것에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를 삶의 원리라는 말로 부르면 어떨까 싶습니다. 소소한 일상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인생 전체가 부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두 가지도 같은 의미로 결론지어질 것입니다. 다만, 불의한 것에 충실하다는 말을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지극히 작은 일에 부정직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부정직하다.”라고 했는데, 훨씬 이해하기 쉬운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삶의 원리를 따라야 하겠는데, 실제는 그렇지 못하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옛 어른들은 “떡 잎을 보면 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매사가 소소하고 미미한 것으로부터 출발하는데, 이를 무시하거나 소홀히 여기게 될 때, 어떤 결과가 올 지는 뻔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어리석음 바로 그 소소하고 미미할 때, 주의하지 못한다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하루의 첫 시간이 그렇고, 첫 걸음이 그러하며, 첫 번째 사용하는 말투가 우리가 신경써야 하고 사려깊어야 할 단계라는 점입니다. 반복되는 생각들이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이 그 사람의 인생관으로 굳어진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이런 삶의 원리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하루가 되라고 명령하십니다.
3. 오늘 저의 막내 사위가 취업이민을 가겠다며 캐나다로 떠납니다. 오랜 준비였다지만, 우리에겐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당황했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삶을 크게 흔들 일들이 불현듯 찾아올지 모릅니다. 그래도 주님의 평화가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