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태도와 구원과의 관계에 대해서. / 눅 19:11-27.
묵상자료 4416호 (2013. 6. 19. 수요일).
시편 시 102:1-5.
찬송 358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혹시 최초의 원시인들은 자신들이 인간이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처음 왔는지 알았을까요? 원시성을 생각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화가는 단연 폴 고갱입니다. 그는 원초적인 삶을 사는 이들과, 그런 삶의 원시성에 대해, 늘 커다란 의문과 동경과 열망을 가졌었지요. 그런 의문과 열망은 곧 인간이 누구이며 또 죽음 뒤에는 어디로 가는지, 인생 전체와 죽음 이후에 대한 질문도 동반합니다. 그런 질문들을 해결하기 위해, 그가 찾았던 곳이 타이티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렸던 그림 중의 하나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라는 그림입니다. 스스로 “나는 이것을 걸작으로 본다네.” 라고 만족스러워했다는 대작이었지요. 그림은 대작답게 하나의 화폭에 세 가지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오른 편에 어린 아이와 여인들을 통해 탄생의 모습, 한 가운데 열매 따는 젊은이를 통한 인생의 모습, 왼편에 움츠려 앉은 늙은 여인을 통한 죽음의 모습 등, 제목 그대로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의 세 가지의 질문을 담고 있습니다. 그 때 고갱은 두 번째로 타이티 체류 중이었지요. 첫 번째 고갱이 타이티를 찾은 건 1891년 마흔 여섯 살 때였습니다. 훗날에 한 미술사가에 의하면, 이런 기대에 부풀어서였다고 합니다. “남태평양으로 출발하면서 고갱이 꿈꾸었던 것은, 목가적인 은둔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영감 오래 전에 망각된 종교와 전통, 장대한 원시 신화의 발견이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3년 3월 20일 방송>a.
2. 오늘 본문 <열 므나 비유>는 마태복음 25:14-30의 <열 달란트 비유>와 비슷한 내용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마태복음에서는 분수에 따라 차등으로 능력을 시험한 것과 달리, 열 명 모두에게 똑 같은 한 므나씩을 맡겼다는 내용입니다. 므나는 로마의 화폐로 약 20데나리온 곧 20일치의 노동자 임금에 해당되는 액수입니다. 그런데 언제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성품이 올곧고 부지런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반대로 허세를 잘 부리고 게으르고 무책임한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똑 같은 조건에서 출발하지만, 그 결과는 엄청나게 벌어지는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듯 자기 인생에 책임적인 자세로 열심히 산 사람은, 그런 삶 자체가 상(賞)이고 행복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또 다시 상을 준다는 점이 저에게는 늘 낯설었습니다. 상이라는 제도를 만든 사람들은, 게으르고 무책임한 사람들을 더 나은 사람으로 변화시키고 싶을 때 고려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열심히 장사하여 많은 이득을 낸 사람에게 “열 고을”, 혹은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상으로 주신다는 얘기에 주목해 보았습니다. 물론 이 비유는 장사 수완이 좋은 사람에게는 관심을 끄는 얘기일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럽게 들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자칫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돈벌이에 혈안이 된 보통의 장사꾼들이 미화될 수도 있을 테니 말입니다. 제 아내는 대 놓고 “장사꾼과는 사돈도 맺지 말아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장사꾼의 양심을 의심합니다. 그러니 이 비유는 정직하고 성실한 노력형 인간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평가함에서, 상을 주는 관례가 가장 보편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삶의 태도가 구원에 이르는 것으로 연결 지을까, 걱정이 생기는 것은 왜 일까요? 바르게 열심히 살면 이 세상에서 잘 살 것은 분명하겠지 만요.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