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녹아든 삶이기를. / 눅 20:9-18.
묵상자료 4421호 (2013. 6. 24. 월요일).
시편 시 103:1-5.
찬송 238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전화벨이 울립니다. 실수로 받았습니다. 기다리고 있는 전화가 있어서 발신인 번호도 확인하지 않고, 그냥 받았기 때문입니다. 상냥한 목소리로 저희 카드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하다며, 혜택을 드리겠다고 합니다. 세상에 공짜 없다는 거 뻔히 알면서도, 혜택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한 터에, 난데없이 노후 준비는 어떻게 하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순간 걸렸구나 싶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요. 아니나 다를까 노후 연금보험 이야기를 꺼냅니다. 설마 이렇게 말하면 물러서겠지 생각하면서 “이미 들어놨어요.” 말했는데, 순진한 대처법이었던 모양입니다. 전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태연하게 이런 물음이 돌아왔습니다. “어디 하나가지고 되겠어요?”
옛날에 우리 조상들은 딸을 낳으면 논두렁에 오동나무를 심었고, 아들을 낳으면 선산에 소나무나 잣나무를 심었습니다. 오동나무는 딸을 시집보낼 때, 혼수로 장을 만들어 주려고, 또 소나무나 잣나무는 자신이 죽을 때 관으로 짜라고 한 거였지요. 둘 다 앞날에 대한 작은 투자였고 대비였으니, 요즘으로 치자면 일종의 보험 같은 거였습니다. 어디 하나가지고 되겠느냐는 질문을 받았지만,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모를 미래 때문에 현재를 희생하고 투자하는 건, 그 정도면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고 싶었습니다. 보험 뿐 만이 아닙니다. 무엇이든 하나만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부추기는 세상입니다. 전보다 분명히 물질적으로는 풍족해졌는데도, 늘 부족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어쩌면 하나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그 막연한 불안감 때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3년 6월 4일 방송>
2. 이어서 이른바 <악한 농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1:23-46에 평행귀가 있는데, <두 아들의 비유>가 오늘 본문에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설교자의 가장 큰 관심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시려는 목적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무엇을 말씀하실까? 하고 주목할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 성경 말씀의 의도를 자신의 회중들에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전달하는 것이 설교자의 임무인 것입니다. 그런데 설교자들은 저마다의 안목으로 그 본문의 중심점을 발견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똑 같은 본문일지라도 시간과 처지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 눈으로 그 중심점을 보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오늘 저의 눈에는 본문의 말미에 있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씀에 꽂혔습니다. 그리고 그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반대로 그 돌이 사람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는 말씀에 머물렀습니다. 건축자는 유대인을, 버린 돌은 예수님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누구든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은 새 사람이 되도록 그의 옛 사람이 깨어질 것이라는 말씀이고,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이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여지없이 부서트리겠다는 말씀입니다. 언제나 같은 맥락입니다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혹은 진정성 안에서 만나지 못한다면,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주님의 말씀을 만나는(encounter) 참된 거듭남이 없다면, 믿는 다해도 믿는 것이 아니고,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닐 테니 말입니다. 말씀을 귀로만 듣거나 머리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말씀을 실제 자신의 삶에 녹여 살아야 한다는 뜻이라 하겠습니다.
3. 오늘 저는 아산에서 있을 저희 교회 베드로회 마르다회 연합 하기수련회를 인도할 예정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