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행함으로가 아님을 연출해 준 강도. / 눅 23:32-43.
묵상자료 4440호 (2013. 7. 13. 토요일).
시편 시 105:31-35.
찬송 211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하일은 끝내 자신의 생각과 고집대로, 도장공인 레지카의 조수가 됩니다. 물론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 마음을 다 이해해 주던 열렬히 사랑해서 결혼했던 귀족적인 아내 미샤 조차도, 끝내는 그의 곁을 떠나 편지를 보냅니다. “다윗 왕에게는 모든 것은 사라지나니 라고 쓰인 반지가 있었대요. 그 반지는 나를 여러 유혹에서 지켜준답니다. 모든 것이 다 사라질 텐데, 무엇이 필요하겠어요.” 미하일은 크나큰 상실감을 느끼지만, 도장공 일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약 내게 반지를 사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나는 아무 것도 사라지지 않나니.’ 라는 문구가 있는 것을 고를 것이다. 나는 어떤 것도 그저 흔적 없이는 사라지지는 않으며, 아주 작은 걸음조차도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의미를 지닌다고 믿는다. 내가 겪었던 것은 헛되이 사라지지 않았다.” 삶의 방식이나 직업을 타인이 아닌 자신만의 기준과 판단으로 선택하는 것이야 말로, 자신이라는 존재를 절대 사라지지 않게 하는, 이 지구상에 남기는 유일하고도 영원한 방식이라고 미하일은 확신합니다. “모든 건 다 지나가고 사라진다.” “아무 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두 개의 반지 중 나는 어떤 것을 선택할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네요.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3년 4월 16일 방송>b.
2. 오늘 본문 중에는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곱 말씀 중에서 두 번의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하신 말씀으로 세상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라는 간구이고(34절), 다른 하나는 다른 십자가에 매달린 오른 편 강도의 부탁에 대한 대답으로, 오늘 그가 주님과 함께 낙원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43절). 저는 강도와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사실 저와 같은 목사들이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 이 짧은 구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우선 죽음을 맑은 정신으로 맞이하는 흔치 않는 경우여서 부럽기도 합니다. 여러 달을 중환자실에서 지내다가 죽음을 맞는 이들과는 너무 다른 때문입니다. 아무튼 두 강도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끝까지 악한 마음으로 비아냥거리는 모습으로, 다른 한 사람은 그 최후의 순간에 제정신을 갖게 되는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는 다음 세상을 생각하였고, 주님께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질문들은 주님의 대답에 대해서 쏟아져 나옵니다. 첫째는 일생동안 나쁜 짓만 해오던 사람이 개과천선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는데, 어떻게 낙원(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말씀하실까? 하는 물음입니다. 그가 행한 가장 잘한 일이란, 그의 곁에 매달리신 주님을 바라본 것이며, 그 주님께 자신의 소원을 말씀드린 것이 전부입니다. 둘째는 죽어서 곧장 낙원으로 간다는 말씀이 성경적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바울 사도의 서신들은 한결같이 주님이 재림하실 때, 죽은 자들은 무덤에서 부활하여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그 보다 더 빨리 낙원에 간다는 것도 그렇고, 더 큰 문제는 심판을 거쳐서 천당과 지옥으로 가게 될 텐데 그런 과정이 생략된 것 아니냐는 물음입니다. 사실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제가 정답을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그 과정을 대답하기에는 너무 무지한 때문입니다. 우선 성경에서도 일관성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몇 가지는 몸의 부활을 할 것이라는 점,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점,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저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첫째 물음은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믿음의 진정성을 보이는 행함을 강조합니다만, 믿음의 진정성은 주님께서 확인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 그 영혼은 구천을 헤매는가? 낙원에 있는가? 하는 물음인데, 이 대답은 시공(時空)에 제한을 받는 우리 인간으로써는 심각할 수 있는 물음이지만,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런 개념들을 초월해서 죽음과 함께 곧 바로 영생의 삶으로 이어진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후의 과정들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누굴 만나 무슨 말을 하며,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며 사는데, 죽음 후를 따지기란 버겁겠지요?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