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제자들. / 눅 24:12-35.
묵상자료 4444호 (2013. 7. 17. 수요일).
시편 시 106:4-7.
찬송 133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젊은 시절 은행원을 했던 예술가로는 장 주오노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특히 아주 일찍부터 은행에서 일했지요. 구두 수선공이었던 아버지는 가난했고, 그는 학업을 계속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열여섯 살 때 벌써 학교를 포기하고 은행에 취직을 합니다. 그러다 전쟁 때문에 입대를 하게 되는데, 거기서 눈에 상처를 입는 사고를 당합니다. 그 때부터 그는 철저한 평화주의자가 됩니다.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도 주제는 당연히 평화와 고요, 자연과의 조화와 순응 쪽으로 기울었지요. 그런 장 주오노의 대표작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건, 소설 [나무 심는 사람들]입니다. 한 노인이 드넓은 황무지에 건질 것 없는 열매를 심으면서, 그곳을 마침내 거대한 낙원으로 바꿔놓는 얘기입니다. 그 내용은 장 주오노가 직접 겪은 실화라고 합니다. 소설속의 노인은 55살의 엘지아르 부피에였고, 장 주오노가 그를 만났을 때 그는 과묵한 양치기였습니다. 한편으로는 3년째 황무지에 도토리 열매를 심는 중이었습니다. 심은 들 황무지의 풍경에는 전혀 변화가 없을 것 같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장지오노가 전쟁에 참가했다 5년에 노인을 다시 찾았을 때 그곳은 이미 황무지가 아니었습니다. 떡갈나무 만 그루가 심겨져 있는 거대한 숲이었지요. 노인이 그새 그렇게 바꾸어놓은 것입니다. 장주오노는 때때로 그를 만나러 갑니다. 노인은 어느 덧 70대가 되지만, 그 때도 여전히 아니 더욱 더 활력이 넘칩니다. 숲 가꾸기에서 새로 양봉을 시작할 정도였습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3년 4월 17일 방송>a.
2. 소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일화를 읽었습니다. 이 본문을 읽을 때면 항상 떠나지 않는 질문이 있습니다. 아무리 두려움과 슬픔 속에서라고 하지만, 3년을 함께 지낸 스승을 몰라볼 수 있다니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망의 크기를 말할 때면, 정신 줄을 놓았다 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생각도 기억도 하얗게 지워져 버린 상태라는 뜻일 수 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은 어떤 의도로 그리했을까요? 가능성은 여럿일 수 있습니다. 우선 굉장한 위협을 느꼈을 것입니다. 당장이라도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을 색출해서 돌로 쳐 죽일지도 모른다는 위협 말입니다. 아니면 지난 3년은 꿈같은 추억으로 삼고,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려고 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요한 등 어부출신들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신 후 어부 생활로 돌아갔다고 말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은 옛 생활로 돌아가려 했다는 게 가장 어울릴 듯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할 수 있다면 과거를 잊고 살려고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지는 느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지혜롭게 살아가는 처세술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의 모습도 음성도 가르침의 내용도 다 지워버렸을지 모른다고 말입니다. 그도 아니면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두려움은 생각과 정신을 마비시키는 무서운 힘을 가진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제자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참된 스승을 몰라보았으니 하는 말입니다.
3. 오늘 오후에 서산 설교 세미나는 끝납니다. 21시간의 강의와 웍샵이 있었고, 참가자에게는 교재, 강의 노트 등이 제공되었고, 앞으로 이런 타입의 순회 강좌를 농어촌 지역으로 넓혀가려고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