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 하는가? / 행 14:1-18.

박성완 2019. 5. 23. 02:26

묵상자료 4457(2013. 7. 30. 화요일).

시편 시 107:23-27.

찬송 36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여름날 저녁, 시인 노천명과 소설가 최정희가 이선희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이선희는 1930년대 여성으로써는 드물게, 개벽 사의 기자로 근무했고, <불야의 여인>이라는 단편으로 등단한 소설가였습니다. 노천명과 최정희는 이선희에게서 일본 유행가를 배우기 시작했는데요. 셋은 노래에 심취해서 다음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계속 불렀다고 하지요. 그런데 갑자기 이선희가 노래를 뚝 그치더니, 나가자고 하더랍니다. 손님으로 온 두 사람이, “애들 아침이나 해 먹이고 나가자.”고 하자. 이선희가 말했습니다. “싫다고. 난 궁상스럽게 이 좋은 아침에 그 짓하기는 싫어.” 이선희는 부득부득 두 사람을 몰고 호텔의 식당에 갔고, 그녀가 음식 값을 치르는 걸 찬찬히 보던 노천명이 말했습니다. “그 돈이면 장을 봐다가 실컷 잘 먹일 텐데.” 그 말을 듣고 이선희가 역정을 내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그런 소리 말아요. 내가 당신들 보는데서 밥을 지어야 속이 시원하겠소? 어림없는 소리.”

   애들 밥을 챙겨야하는 주부의 본분을 저버린 행동이라고 흉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부라고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살림이 늘 흔쾌할까요? 해도 끝이 없, 잘 해도 티가 나지 않으며, 휴일조차 없는 살림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면 앞서 이야기한 이선희의 일화가 떠오릅니다. 그녀가 애들 밥상 차리는 것을 뒤로 미루었던 마음은, 엄마나 주부로써 보다 동료이자 작가로 보이고 싶었던 건지 모릅니다. 혹은 동료들을 핑계 삼아서 평소에 간절했던 작은 꿈 하나 실행에 옮긴 것일지도 모르지요. 사람은 기계와 달라서 매일 똑 같이 해야 하는 일은 억압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의 작은 일탈은 오히려 활력소가 될 수 있겠지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372일 방송>

 

2. 1960년대 우리 한국의 신학계는 알렌스키가 던졌던 물음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 하는가?”로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목적이 너무 강해서 다른 모든 수단은 철저하게 무시되고 희생되어야 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낯선 이방 세계에서 그들에게 유대인의 회당은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 거기에는 무엇인가 진리를 찾겠다고 들을 귀를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었을까 생각하면 상상이 되고도 남습니다. 즉석에서 동의를 표하는 사람도 있었을 테고, 반대로 고개를 흔들며 반대를 표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뭔가를 알고 있었을까 하는 물음을 해 보면, 부정적인 생각이 드는 것은 경험 탓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기적이나 이적을 복음 전달의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루스드라에서 한 앉은뱅이를 고쳤는데, 이를 본 그 지방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이 강림하셨다고 야단법석을 떨면서 두 사도에게 의 이름을 부여하고, 그 앞에 제물을 차려놓고 제사를 드리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옷을 찢으며 자신들도 같은 사람이라며,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전합니다. 그들이 만일 그 치유의 은사를 신앙의 목적으로 삼았다고 한다면, 사도들은 적어도 그들에게는 으로 군림하였을 뿐 아니라, 훨씬 더 효과적인 선교를 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부자가 되는 것을 보고, 성공하는 것을 보고, 하는 일마다 형통하는 것을 보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알 만한 사람들이 그것은 수단일 뿐이라고, 목적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하셨고, 지금도 진행 중인지를 깨달으라고 하나님께로 눈을 돌리게 하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공은 참 신앙의 열매이며, 실패는 참 신앙의 또 다른 열매입니까? 다시금 질문해 봐야 하겠습니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인가?

 

3. 어제 저녁은 몽골 잘로스 10명을 초대해서 유익한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4명은 기독교인이었고, 나머지는 아직 교회 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분명 몽골의 귀한 일꾼들이 될 것입니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기 민족에게 하나님을 향해 눈을 돌리도록 위대한 일을 하도록 도와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