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야는 다윗의 자손이며, 마리아의 아들인가? / 막 12:35-44.
묵상자료 4481호 (2013. 8. 23. 금요일).
시편 시 114:1-4.
찬송 229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날 아침 모기가 이구아나에게 말했습니다. “어떤 농부가 고구마를 캐는데, 글쎄 그게 나만큼이나 크더라고.” 이구아나는 헛소리라며 나무 가지 두 개로 귀를 막고 가버렸습니다. 지나가던 뱀이 이구아나를 보고 인사해도 그냥 가버렸습니다. 조금 전에 귀를 막아서 들리지가 않았으니까요.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뱀은 이구아나가 자기한테 나쁜 주문을 걸었다고 오해하면서 겁을 먹고, 토기 굴에 숨어 버렸습니다. 놀란 토끼는 굴 밖으로 뛰어나갔고, 그 모습을 보고 까마귀가 울었고, 까마귀 울음을 들은 원숭이가 위험한 짐승이 온다며, 위험을 알리려고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다가 썩은 나뭇가지를 밟았습니다. 그 나무 가지가 올빼미 둥지를 덮치는 바람에, 그만 아기 올빼미가 죽고 말지요. 엄마 올빼미는 구슬프게 울었고, 끝없이 밤이 계속됐습니다. 아침이 오지 않으니 큰 일 났습니다. 동물의 왕 사자가 긴급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사자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미국의 작가 버나 알디마가 서아프리카의 전래 담화를 동화로 다시 쓴 <모기는 왜 귓가에서 앵앵거릴까?> 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사자는 모기를 잡아서 죄를 추궁하지도 벌을 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문제가 말끔하게 해결됐는데, 그건 엄마 올빼미의 슬픔에 공감함으로써 이었습니다. 진상을 다 파악한 사자가 말하지요. “아하, 모기 때문에, 이구아나가 화가 나는 바람에, 뱀이 무서워하는 바람에, 토끼가 겁을 먹는 바람에, 까마귀가 소리 지르는 바람에, 원숭이가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바람에, 아기 올빼미가 죽었단다. 그래서 엄마 올빼미가 해를 안 깨우고, 그래서 낮이 오지 않는 거란다.” 그러자 모든 동물들이 한 목소리로 모기를 혼내 달라고 외치고, 비로소 엄마 올빼미의 마음이 풀립니다. 이 얘기를 듣고 보니 과연 그랬습니다. 잘 잘못을 따지기 전에 상처받은 이의 슬픔에 공감해 주기만 해도, 사람들 사이에 생기는 문제의 대부분은 해결할 수 있을 텐데 하고 말이지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3년 8월 7일 방송>
2. 오늘 본문은 세 가지 서로 다른 가르침들입니다. 다윗과 메시야의 관계(35-37절), 존경받지 못하는 지도자상에 대해서(38-40절), 헌금하는 자세에 대해서(41-44절)이 그렇습니다. 이럴 경우 한 자리에서 셋을 모두 얘기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묵상하기에도 벅찬 일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다윗과 메시야의 관계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성경에서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을 예언하는 곳이 많습니다(사 9:2-7, 렘 23:5-6, 겔 34:23-24, 호 3:5, 암 9:11, 마 9:27 등). 그래서 습관적으로 메시야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그 대표적인 곳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많은 시민들이 종려가지를 꺾어 들고 환영할 때 소리쳤던 구호가 그렇습니다(마 21:9).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다윗의 말을 인용하면서, 다윗이 메시야를 주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그의 자손이 될 수 있느냐고 기존의 관행들을 엎어버리신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으면서, 사실은 다윗의 자손일 수가 없으신 분인 셈입니다. 같은 논리로 마리아의 몸을 빌려 오신 마리아의 아들이면서 사실은 마리아의 아들일 수 없는 예수님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사이에 반드시 건너야 할 대목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을 일꾼으로 부르시고 그 일에 합당하게 능력을 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그런 일꾼들 가운데 메시야를 보내시는 방법은 아주 독특합니다. 하늘에서 직접 내려오시는 신비한 존재로써가 아니라, 사람들 속에서 태어나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족보와 사람들의 몸을 빌리는 경우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윗의 족보에 들어오셨고, 마리아의 몸을 빌리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 일꾼들은 다른 하나님의 일꾼들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일꾼 된 것이지, 그들 스스로가 위대하거나 하나님에 버금가는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말에서도, 마리아의 말에서도(눅 1:46-48) 한결같이 주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을 신비화 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며, 성경적인 이해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3. 어제 늦은 저녁, 오랜 교우 한 분을 하나님 품에 맡기는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요한 비헤른 봉사상>을 받으실만큼 섬김의 삶을 사셨습니다. 슬피 우는 유족들 한 분 한 분을 안아 주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