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남겨졌다고 생각될 때. / 막 14:27-42.
묵상자료 4488호 (2013. 8. 30. 금요일).
시편 시 116:6-11.
찬송 413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전문 학자가 아니니, 기상과 지형의 관계를 자세히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겐 그곳을 처참하게 휩쓸어버린 토네이도의 규모가, 곧 자신이 그곳에서 감탄했던 광활한 지평선과 저녁노을의 규모와 비례하는 듯 했습니다. 탁 트인 드넓은 벌판의 규모만큼, 바람도 그 규모를 거칠 것 없이 마음껏 늘리며 강해지는 듯 했습니다. 땅의 규모가 작은 우리나라에선 그 광활한 지평선과 대단한 규모의 저녁노을을 볼 수 없는 것만큼, 그런 위력의 토네이도도 없는 거겠지요. 그래서 어디서 태어나거나 사는 게 더 다행이고 더 불행이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는가 봅니다. 바람의 위력을 걸러주는 산이 있다 해도, 장마며 태풍의 위력이, 우리에게는 우리에게 대로 토네이도 급이니까요. 결국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디서 태어나거나 어떤 풍경 속에서 살거나, 다 저마다의 기쁨과 어려움이 제각각 있는 법이 아닐까? 단순한 비교에서 오는 행복이나 불행은 무의미하다는 생각. 중요한 건 자신이 지금 있는 곳에서 자신의 발전을 위해 매 순간 노력하는 것. 그러면서 거창하지만 인간과 세상의 발전도 더불어 생각하고, 자연 앞에서는 겸허할 줄 아는 것. 그것이 어디에서 살든 누구에게든, 최선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3년 5월 28일 방송>b.
2. 오늘 말씀은 제자들이 자신들의 스승이신 주님을 부인할 것이라는 예고의 말씀과(27-31절),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일화를 말씀하고(32-42절)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 스승을 배신한다는 것, 상상하기도 힘든 일처럼 생각되지만, 인류 역사에는 그리 드문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이야기가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그의 제자 칼 융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끝까지 스승의 뒤를 따를 제자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맞아 떨어졌는데, 그런 예고를 하신 까닭이 궁금해졌습니다. 가장 외롭고 힘든 시간에 홀로 남겨진다는 것, 그 아픈 마음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가끔 그런 시간을 맞곤 합니다. 내 곁에 아무도 없다는 생각, 그 때 주님을 바라볼 시간입니다.
누군가 제게 물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그대로 따르는 사람이 몇이나 될 거라 생각하세요?” 제 대답은 예수님 같은 분도 12명에서 11명으로 그리고 한 사람도 없이 다 도망갔을 때도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잠간이었던 것입니다. 나폴레온의 말을 인용하면, “나사렛 예수는 죄인으로 죽었지만, 그를 따르려는 무리들은 계속해서 늘어가는구나.” 고 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약속의 의미처럼 말입니다. 훗날 누군가가 제 이름을 기억해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기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스승과 제자, 매년 5월 15일이면 듣던 <스승의 노래>가 지금도 울컥하게 하는 것은 그런 작은 소망이 있어선지 모르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