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 복음서의 첨가 부분에 대한 유감. / 막 16:1-8.
묵상자료 4499호 (2013. 9. 10. 화요일).
시편 시 119:1-4.
찬송 349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누구도 완벽한 존재가 아니니, 양쪽에도 다 고쳐야 할 특징이 있습니다. 외향적인 이들은 늘 일상의 에너지를 바깥 자극에서 얻습니다. 그러다 보니 외부 사람들한테 요구하거나 기대하는 것도 많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쉽게 애정 결핍을 느끼거나 호소하게 된답니다. 상대방에 대한 지나친 간섭과 요구를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면 내성적인 사람들은 자기만의 시간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잡담 같은 걸 마냥 불필요한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냉정하거나 잘난 체 하는 인상을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상은 자의든 타의든 완전히 혼자만의 시공간일 수 없습니다. 적당히 잡담도 즐기고 내키지 않은 모임이나 만남에 응한다던지, 상대방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적극성도 필요합니다. 전적으로가 아닐 뿐 더러는 꼭 필요합니다. 결국은 세상 사람들 모두 저마다 가장 행복하게, 그러면서도 건강한 관계 속에서 지낸다는 건, 저마다 자신만의 타고난 특징을 갖고 지키면서 상대방을 인정해 주고, 그러면서 알맞은 정도의 공통점을 위해 서로 또 각각 노력하는 것. 타고난 성격에도 자신만의 몫으로 지녀야할 것과, 공통의 몫으로 내 놓고 양보해야 할 게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3년 7월 3일 방송>b.
2. 지난 주말 한 일간지에는 인천의 가톨릭교회 신부님의 칼럼이 실렸습니다. “인천의 교회가 바뀔 때 인천의 미래가 있다.”는 요지의 칼럼이었습니다. 처음엔 개신교회의 목사를 먹사라고 호칭하는 등 개신교회의 치부를 들어내어서 많이 부끄러웠는데, 그 다음에는 자신들의 치부를 들추고 있어서 균형감각을 가진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오늘의 교회들, 아니 종교들이 위험수위를 오락가락 하는 것은 숨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세상이 다 아는 유명한 지식인도, 온갖 비리와 문제들을 온 몸으로 뒤집어 쓴 채, 성령만능을 외치는 그런 목사 앞에서 순한 어린양이 되어 버리니 이를 어찌할 거냐고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사람 자체가 불의하고 부정한 데도 그의 주장들이 먹혀들어가고 있으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평소에 정리되지 못한 저의 머리를 말끔하게 일렬종대로 헤쳐 모이게 했습니다.
왜 이리 되었을까? 신앙이란 무조건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 데서 출발한 것은 아닐까 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마가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이라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하면 9절 이하는 주님의 부활 후 행적을 취급하는 내용인데, 이 부분이 후에 첨가된 내용이라는 겁니다. 그 주장은 가장 권위 있는 고대 사본들, 시나이 사본이나 바티칸 사본들에 의하면, 마가복음은 16:8에서 끝나는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본들은 괄호로 묶어서 9-22절을 첨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후대에 다른 복음서들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첨가되었다는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억지로 균형을 맞추려고 첨가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게 저의 소견입니다. 안식후 첫날 무덤을 찾은 여인들이 빈 무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그리고 부활을 증거하는 흰 옷 입은 청년의 증언만으로 오히려 마가복음서 답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인간들의 연약함과 허술함을 인정해 주실 뿐 아니라, 오히려 그런 인간을 잘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우리 입맛에 맞는 삶을 살고 싶어 할 뿐 아니라, 하나님까지도 성령님까지도 우리 입맛에 맞추려고 감히 억지를 부리는 것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덧칠하는 게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신앙이란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님은 물론, 인간의 이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것임을 아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이성을 무시하고 무조건 따르는 신앙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이해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이해를 가능케 한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