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주 안에서 서라. / 빌 3:17-4:7.

박성완 2019. 5. 24. 00:57

묵상자료 4503(2013. 9. 14. 토요일).

시편 시 119:17-20.

찬송 35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한강다리로 연결되는 8차선 대로가 어쩐 일로 한가했습니다. 빈 도로 저 끝. 아지랑이가 아른거리며 피어오르고, 그 너머로 물빛 오아시스가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서울의 도심 한 복판. 오아시스가 있을 리 없으니, 아마도 살수차가 물청소를 하고 지나간 모양이라고 스스로를 이해시켰습니다. 신호가 바뀌고 방금 전 오아시스가 보였던 자리를 지났습니다. 도로 위에 물기라고는 보이지 않았지요. 방금 전에 본 것은 그러니까 신기루. 뜨거운 여름 태양이 달궈놓은 도로가 토해놓은 더운 공기사이를, 빛이 이리저리 굴절하며 통과하느라 생긴 착시현상이었습니다. 나는 신기루를 보았습니다.

신기루를 보았다. 이상한 말입니다. 신기루란 실제로는 없는 것, 없는 것을 보았다니 이상한 말일 수밖에요. 그러나 방금 전에 나는 분명히 그것을 보았고, 그것은 실제로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도 사막에 가 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이런 느낌이겠지요. 발아래 모래는 데일 듯이 뜨겁고, 여기에서 주저앉으면 몸도 마음도 모래가 되어서 흩어질 것처럼 지쳤을 때, 저 멀리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오아시스가 보입니다. 야자수 그늘아래 시원한 오아시스에 발을 담그고, 그렇게 시원해질 생각이 기운이 나서는, 그곳까지 달려갈 기운이 생깁니다. 오아시스 콤플렉스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목마른 사람이, 물 야자나무 그늘을 본다고 상상합니다. 믿을만한 증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믿어야 하는 간절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내가 바라는 모습 그대로의 환각. 갈증은 물의 환각을 낳고. 사랑에 대한 요구는 이상적인 남자나 여자라는 환각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비록 환각일 지언정, 그 힘으로 사막을 건넬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이미 오아시스입니다. 우리에게 꿈이 그렇고 사랑이 그렇고 또한 예술이 그렇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3819일 방송>

 

2. “주 안에서”,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관용어는 바울 사도가 즐겨 사용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는 무슨 생각이든 활동이든, 주 안에서 할 것을 권고합니다. 까닭은 주 안에서만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생각일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행동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관용어, 주 안에서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를, 기독자의 존재양식(存在樣式)이라는 말로 쓰기를 가르쳐 왔습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기독자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말입니다. 안수 받은 목사라도 기독자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밖에서 말하고 행동하면 말입니다. 물론 주 안에서,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가 과연 무엇이냐는 구체적으로 따로 생각할 일입니다만, 일단은 이 관용어의 무게를 셈했으면 좋겠습니다. 본문에서 사도는 몇 마디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 서라.”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주 안에서 기뻐하라.”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뿐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주 안에서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공통분모이신 그리스도 예수가 한 복판에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주 안에서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 주 예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친히 보여주신 삶에 대한, 매우 포괄적인 광의의 개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생각에 부합하여 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종종 성경을 인용할 때, 맥락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구적으로 혹은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의 위험을 지적하곤 했습니다. 가령, 12:49-53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화평을 주려고 세상에 오신 게 아니라, 분쟁케 하려고 오셨다는 내용입니다. 이 구절을 가지고 기독교인은 세상을 원수로 생각하고 싸워야 하는데, 가족과도 예외가 아니다 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우주적 파국이라는 종말을 염두에 둔 매우 특별한 상황을 가상하고 있습니다. 신앙과 불신앙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피할 수 없는 상황 말입니. 아무튼 주 안에서 라는 의미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주 안에서 말하고 살게 도와주옵소서! 아멘.

 

3. <살생부>라는 것을 만들었음을 고백합니다. 26명을 묵상식구 명단에서 빼어내 버리겠다는 계획으로 말입니다. “수고했습니다.” “고맙습니다.”는 등의 한 마디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대상이었습니다. 그것도 수년 동안 말입니다. 인격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게 그 이유입니다. 그런데 몇 분이 팔을 걷어붙이고 말리셨습니다. 괘씸하기는 하지만, 철이 늦게 드는 경우도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 결심을 멈추기로 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