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해 질 수 있기를 기도합시다. / 고전 2:1-13.
묵상자료 4507호 (2013. 9. 18. 수요일).
시편 시 119:33-36.
찬송 94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냥 머리로만 생각하고 머리로만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질 때, 한없이 게을러질 때면, 클라라는 몸으로 생각하고 몸으로 그림을 그렸던 화가 반 고흐를 생각합니다. 그는 한 점의 작품을 완성하기 전에, 수 십 점의 데생을 미리 그려보곤 했지요. “가장 급한 것은 데생이다. 붓으로 직접 하든 펜이나 다른 것으로 하든, 데생은 아무리 많이 해도 충분하지 않다.” 그는 동생 태흐에게 늘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걸작이란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하는 구상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직접 몸과 손으로 그려보고 익히는 사이에 나온다고 봤지요. 소설을 쓰기 위해서 더 많은 공부를 해야겠다 라고 하는 여동생에게도 고흐가 보낸 답장 속에도, 고흐의 그런 마음이 잘 들어나 있습니다. “제발 그러지 말아라. 내 소중한 동생아, 차라리 춤을 배우든지 장교나 서기 누구든 네 가까이 있는 사람과 사랑을 하렴. 한 번도 좋고 여러 번도 좋다. 공부를 하느니 차라리, 그래 차라리 바보짓을 몇 번이든 하렴. 공부는 사람을 둔하게 만들 뿐이거든.” 공부를 더 해야겠다 라고 하는 동생에게 고흐는 이런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공부를 하는 것 보다는 삶속으로 사랑 속으로 그리고 소설과 그림 속으로 곧 바로 직진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클라라는 공부가 관념에 사로잡히는 것이 오히려 몸을 둔하게 한다는 고흐의 말에 공감합니다. 그래서 클라라는 머릿속만 분주한 채, 손과 몸이 게을러지는 순간을 경계하지요. 손과 몸이 둔해진 채로 머리만 바빠지다 보면, 단순 경쾌한 직관력마저 둔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10년 4월 8일 방송> b.
2. 요즘 많은 스승들이 단순한 생활에 대해서 충고를 합니다. 그러니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단순하게 생각하라던 지, 복잡하게 일을 만들지 말고 단순하게 처리하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막상 문제 앞에서 그런 충고가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가령 오늘 본문에서 사도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말씀할 때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코앞에 태산처럼 버티고 서 있는 현실이라는 문제들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 생각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아마도 저 같은 철부지 목사들의 설교에 대해서도 그런 볼멘소리를 하고 싶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도무지 현실적이지 않은 말을 하고 있다는 얘기라고 말입니다. 누군가가 “목사님,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알고, 그 분이 지신 십자가의 의미를 알기만 하면, 저의 현실적인 문제가 풀리는 것입니까?”라고 묻기라도 한다면, 제가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요?
저 역시 요즘 구석에 몰린 신세가 되어 있는 게 사실입니다. “목사님, 제가 얼마나 잘못을 많이 했기에, 이렇게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걸까요?” 라는 질문 앞에서 묵묵부답으로 무기력함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왜 이런 시련을 겪고 있는지. 이 시련의 끝이 언제일는지 전혀 짐작도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시련이 끝날 날이 있다는 것과, 이 시련 때문에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게 될 것이라는 것은 말할 수 있습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많았거든요. 앞을 보면 캄캄하지만, 뒤를 돌아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고 넘쳤으니까요. 그러니 지금까지 지켜주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그러시리라 믿고, 오늘을 묵묵히 견디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저의 모습입니다.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시련 앞에서 예수님만 바라보는 일, 주님이 지신 십자가만을 생각하는 그런 단순한 일이 가능할 수 있기를 바랄 뿐 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