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임박한 종말 때문에 더욱 혼인할 이유. / 고전 7:32-40.

박성완 2019. 5. 25. 02:56

묵상자료 4520(2013. 10. 1. 화요일).

시편 시 119:89-92.

찬송 28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여자 친구 잘 만나고 있냐고 물었더니, 아들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어머니가 난데없는 주의를 줍니다. “, 여자 친구 가방 들어주지 마. 그것처럼 꼴불견도 없더라.” 어머니 가방은 한 번도 들어 준적 없던 아들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저는 안 그래요.” 할 줄 알았는데, 아들은 예상치 못한 답변을 들려줍니다. “그게 뭐 어때서요? 여자 가방이 얼마나 무거운데요?”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아들이 살짝 얄밉기도 했습니다. “, 그렇게 무거울 것 같으면, 집에서부터 어떻게 메고 나왔겠니? 다 메고 다닐 만하니까 메고 나왔겠지.” 아들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내가 대신 들어주면 좋지 않아요.” 어머니는 기가 막혀서 남자가 여자 가방 메고 다니는 게 창피하지 않냐고 했더니, 아들은 요즘 남자들 다 그런다면서, 좋아하는 사람의 짐을 들어주는 건 당연하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아들의 표정은 그런걸 꼴불견이라고 하는 엄마가 속 좁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말문이 막혀 남편을 흘겨보자, 그는 유구무언이라 눈만 끔뻑끔뻑합니다.

   오랜만에 남편과 밖에서 만나, 식사를 하고 산책을 하다 집에 들어오기로 했습니다. 일찌감치 집에서 나와 서점에 들러 책을 사고, 길거리에서 주방용품 두어 가지를 사서, 가방에 몽땅 넣었습니다. 처음에는 메고 다닐 만 했는데, 걷다 보니 어깨가 무척이나 아팠습니다. 본 척 하던 남편이 멋쩍게 묻습니다. “가방 들어줄까?” 됐다고 했습니다. 여자 가방을 메고 다니는 중년의 남자라니. 누구보다 자신이 제일 창피합니다.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의 짐을 들어주는 건 당연하다고 했던 아들이, 제법 대견하게 느껴집니다. 때로는 이렇게 아들에게 배울 점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거는 그거고, 아들이 여자 가방 메고 다니는 모습을 상상하면 여전히 마뜩치 않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3925일 방송>

 

2.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이 가진 정신에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 22일 독일 총선은 기민당 당수 앙겔라 메르켈 총리에게 시선을 주목하게 하는데, 영국의 수상을 지낸 대처를 능가하는 3선 총리로 장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메르켈의 신비로운 인기의 원천을 목사의 딸로서 몸에 프로테스탄트 윤리의식, 동독에서 얻은 평등의식, 자연과학자로서의 과학적 합리적 정신이라고 꼽고 있었습니다. 경제 위기를 겪는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를 회생시키려는 유럽 연합의 좌장 격으로 활동하던 모습에서도, 그녀의 정신이 유감없이 발휘되었음은 물론입니다. 그런데 이런 정신이 아무리 올바른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실천 방법까지 올바르지 않는다면 문제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아직 미혼인 처녀와 총각들에게 독신을 강조하는 사도의 주장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한 복판에는 임박한 종말관이라는 사상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개역 성경에서는 때가 단축하여진 고라고 했는데,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라고 말하는 대목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임박한 종말이라는 정신이 모든 삶의 문제들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 개인 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 임박한 종말사상은 누구나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주제입니다. 누구도 자신의 죽음의 시간을 알 수도, 예측조차도 할 수 없는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루에도 몇 차례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가는 것 같은 상황을 목격하는 우리의 삶입니다. 교통사고나 가스 폭발 등 이런저런 사건들로 처참하게 죽어가는 이웃들을 대할 뿐 아니라, 천길 나락으로 추락하는 사람들이 결코 남의 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 순간을 종말론적인 자세로 살 이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아니라, 주를 위해서 라고 할지라도, 혼인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독신주의 주장은 지나치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거룩한 제도일 뿐 아니라, 혼자가 아니라 둘이서 아니 가족 공동체가 함께 맞이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종말론적인 자세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혼자 맞는 기쁨과 슬픔보다는 함께 맞는 것이 두 배 세 배나 더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 때문에 죽을 수도 없었다.” 어느 지체장애 아들을 둔 어머니의 말이었습니다. 함께 웃고 우는 삶을 다시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