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의 바다에서 살고 있음을 느낄 때. / 고전 10:14-11:1.
묵상자료 4526호 (2013. 10. 7. 월요일).
시편 시 119:113-120.
찬송 357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해적선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해적 깃발입니다. 으레 해골에 대퇴골 두 개를 겹쳐놓거나, 해골에 칼 두 개를 겹쳐놓은 문양이 그려져 있는데요. 해적 깃발을 서양에서는 줄리 로저라고 부릅니다. 깃발 이름이 어째 사람이름 같아서 해골의 주인이 줄리 로저다 라는 설도 있었지만요, 맨 처음 이 깃발을 사용한 해적 바로 톨리움 로버츠의 별명이 줄리 로저라서 그냥 깃발 이름도 줄리 로저가 됐다고 합니다. 해적이 자신들의 깃발에 해골을 그렸던 이유는, 오늘날 독이나 폭발물 위험을 경고하는 데에 해골 문양을 쓰는 것이나 비슷했겠지요. 그런데 해적 깃발이 아니더라도, 서양에서는 이미 중세시대부터 해골 그림과 친숙했는데요. 어떤 이유에서였을까요? 14세기 중반 유럽은 흑사병으로 전체 인구의 4분지 1을 잃었습니다. 해골이 예술과 관련한 작업에 등장하거나 장식을 위한 모티브로 사용되기 시작한 건 이 때부터였습니다. 특히 바니타스 정물화에 자주 등장했는데요. 바니타스는 16-17세기 유럽에서 유행했던 그림 양식으로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 구절에서 이름을 따왔습니다. 바니타스 바니타툼 에트 옴니아 바니타스(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바니타스 정물화는 언 듯 봤을 때, 화려합니다. 부자의 식탁을 포착한 듯 보석이나 은식기 값비싼 공예품이 등장하고, 귀족이나 예술가의 책상인 듯, 책과 악기 등이 등장하기도 하는데요. 여기까지만 보면 집안을 장식하기 에 손색없는 정물화지만요, 잘 살펴보면 어딘가 해골이 있습니다. 때로는 해골 대신에 모래시계나 비눗방을 꺼져버린 초 시든 꽃일 때도 있지요. 이들이 상징하는 것은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입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권력이나 명예가 높아도, 당신은 유약하기 짝이 없는 육체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언젠가는 죽는다. 삶은 유한하다 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요. 한 솔바인의 대사들은 대표적인 바니타스 그림입니다. 그림속의 두 남자는 한 눈에 봐도 높은 신분을 짐작할 수 있는 복장이고, 그 뒤로 보이는 탁자에 해 시계 지구의 수학책 줄이 끊어진 요트와 피리, 찬송가 등, 세속의 부와 명예를 상징하는 물건들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마치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반전시키듯, 타일 바닥에 기묘한 형상으로 길게 늘어져 있는 무언가가 보입니다. 바로 뒤틀린 해골입니다. 해골은 바니타스 바니타툼 옴니아 바니타스,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다지 유쾌하지 않는 바니타스 그림을, 굳이 주문해서 집안에 걸어놨던 건, 유한한 삶을 충실하게 살기 위해서, 정신을 가다듬고 싶어서 이었을 텐데요. 하지만 같은 해골이라고 어디에 그려지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술잔이나 술집에 그려지면 어차피 인생은 짧으니,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을 때, 최대한 즐기자 라는 뜻이 된다고 하지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3년 7월 11일 방송>
2. 우상숭배의 어리석음을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닐 것입니다. 나름 이유가 있을 테지만, 아마도 그게 가장 쉬운 방법으로 생각한 때문일지 모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을 우상에게 하듯 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을 비인격적인 물체마냥 대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철부지 자식에게도 할 수 없는 자세를 하나님께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느 대형교회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넙죽 엎드려 교인들에게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답니다. 그래서 문제가 없던 것처럼 된 모양입니다. 그 일이 있고부터 그 흉내를 각 가지 모양으로 내고 있다고 합니다. 가짜임이 확인되면 물러나겠다고 공언했으면 그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무슨 미련이 남아서 이토록 전체 기독교회를 아수라장으로 만드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독교회는 이런 지도자들 때문에 신뢰를 잃었습니다. 이런 거짓된 사람이 하는 말이 어떻게 진실하고 믿을 수 있게 들리는지 모르겠습니까? 우상에게 하듯 하나님을 대하는 모습들입니다(14-22절).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무슨 말입니까? 제사 지내고 나온 물건인가 아닌가를 묻지 말라는 것입니다. 과연 우상과 무관한 것들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배가 고파 식당엘 들렸는데, 음식에 한참 수저가 오간 다음에 출입구 위쪽에 걸린 부적과 마른 명태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우상숭배자의 집에서 밥을 사 먹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전혀 배탈이 나지 않고 잘 먹었습니다. 우상은 존재하지 않는 거짓 신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자신들과 남을 속이려고 만든 물건 때문에, 정작 하나님이 선물하신 것들을 거절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들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그가 말한 양심을, “너희의 것이 아닌 남의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양심을 생각해서 묻지 말고 먹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다른 사람의 양심이란, 초대한 주인의 양심도 아니고, 초대된 또 다른 기독자의 양심으로, 그는 우상의 제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기독자인 자신에게 알려준 사람이라고 주석은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상의 제물을 확인하고도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믿고 거리낌 없이 먹는 그의 양심을 고려해서 더 이상 고민도 묻지도 않고 먹을 수 있다는 뜻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구원과는 아무 관계없는 아디아포라의 문제였습니다.
3. 어제 주일은 참 힘들었습니다. 독한 감기약을 먹고 심방을 강행한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늘은 죽을 것 같다에서 살 것 같다로 바뀌었습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