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면. / 고전 12:12-26.
묵상자료 4530호 (2013. 10. 11. 금요일).
시편 시 119:145-152.
찬송 490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삶은 굽이굽이 멀미 같은 것이어서/ 누군가 옆에서 말을 건네야 하는 것인데” 이용섭 시인의 <멀미>라는 시 중의 한 구절입니다. 굽이굽이 고갯길을 넘어가는 차 안에서 멀미가 날 때면, 옆에서 누군가 자꾸 말을 시켜 주어야 한다는 데요. 살면서 굽이굽이 힘든 길 넘으며 흔들릴 때도 그렇지 않은가 싶습니다. 옆에서 말 걸 사람이 한 명 있다는 것만으로 그 멀미를 견딜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시 지금 힘든 티 안내고 멀미를 견디는 사람이 옆에 있지 않은지, 혹시 내가 말을 계속 걸어주어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번쯤 옆을 돌아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KBS FM 1, 풍류마을, 2013년 7월 24일 방송>
2. 1960년대와 1970년대는 “다양성 속의 일치”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반복되었습니다. NIV 성경은 오늘 본문을 “Unity in Diversity” 라고 표제어를 달고 있습니다. 21세기를 맞은 우리는 더 이상 단일 민족도, 영호남도, 학연과 혈연도 따질 수 없는 다문화 세계의 대열에 합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칫 다문화가 가져올 복잡함과 혼란스러움을 예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양성 속에서 일치라는 고도의 기술이 요구된다 하겠습니다. 언어와 종교 전통 피부색 등은 다양성의 내용들입니다. 이런 다름은 서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일치점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는 교회를 설명하면서, 몸과 그 지체들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몸은 다양한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다양한 지체들이 한 몸의 유익을 위해서 일사분란하게 일한다고 말입니다. 교회는 머리되신 주님을 중심으로 하는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지체들은 항상 자기 자신보다는 몸의 유익을 위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지체된 사람들이 철저하게 지켜야 할 덕목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는 교회를 송두리째 흔들어 넘어트리게 하는 사탄의 앞잡이가 될 뿐입니다.
작금 우리는 다양한 소리들이 분출되는 시대를 절절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들어보면 모두가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이야기들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깨닫게도 되고 배우게도 됩니다. 그런데 못내 아쉬운 점을 금할 수가 없는 것은, 일치를 향한 대안이 보이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처음부터 일치를 향한 그 어떤 목표도 대안도 갖고 있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다양성의 의견들 중에서 가장 힘센 의견으로 이기고 싶어 했다는 얘기입니다. 오늘 본문을 그대로 원용해서 말씀드린다면, 눈이 손에게 나는 너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우쭐대는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왜 일치에 관심이 없는 걸까요? 처음부터 생각이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것을 끝없는 권력욕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래서 사전(史前)에 위험한 가지들을 쳐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리수를 두는 것입니다. 정지 작업을 해서, 고속으로 달릴 수 있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걸림돌이 될 만한 것이 있다면 싹부터 잘라야 했을지 모릅니다. 이런 야망에 불타는 사람들에게는 일치는 처음부터 고려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다양성이 제 구실을 하려면, 일치에 목표를 두어야 가능할 것입니다. 다음 달에 열릴 WCC 부산 총회가 다양한 목소리들을 다 품을 수 있는 그런 포용력을 가진 역할을 끝까지 잘 수행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 오늘 저희 교단 정기총회를 마치고 오후에 올라갑니다. 서울에서 뵙겠습니다. 주님의 평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