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을 이유. / 고전 15:1-12.

박성완 2019. 5. 25. 03:17

묵상자료 4537(2013. 10. 18. 금요일).

시편 시 121:5-8.

찬송 26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자는 강한 근육을 갖고 있지만, 그 근육의 중량 때문에 스피드와 지구력은 떨어진다고 합니다. 치타는 요, 엄청난 스피드를 자랑하지만, 또 대신에 근육의 힘은 떨어진다고 합니다. 각 분야에서 최고라고 꼽히는 동물들을 보면, 그 한 가지를 얻기 위해서 다른 것을 포기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들은 자신이 포기해야 할 부분에 대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유일한 동물이 아닌가 합니다. 결국은 다 얻지 못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우리는 다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모자란 부분을 채우고 싶어 하지. 그것이 인간의 문명을 여기까지 이끌어오기도 했지만, 또 때로는 그 때문에 스스로 지치게 됩니다. 내가 왜 지치는지, 왜 힘드는 지 잠시 생각해 보면, 혹시 사자이면서 치타이고 싶어 하기 때문, 아닐까요? <KBS FM 1, 풍류마을, 2013726일 방송>

 

2. <그리스도의 부활>, <바울이 전한 복음>이라는 표제어가 붙어 있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똑 같은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 제목을 정하는 것은 극히 주관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체적인 내용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지만, 그것을 전하고 있는 것이 바울의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분명한 사건이고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사건이나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한 일인지 아닌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서는 이 보다 더 중요한 기쁜 소식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사건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사건의 의미를 진지하게 살필 뿐 아니라, 사람들의 뇌리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까닭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사람에게 관계가 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되는 때문이었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부활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크고 중요한 사건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동안 우리는 복음이라는 말을 그 무게만큼 실어서 느끼지를 못했는지 모릅니다. 우선 입맛에 당겨야 하고, 피부로 느껴야 하는 것에서 기쁜 소식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로 들을 수도 없는 것들은, 그리고 먼 훗날 일어나게 될 것쯤이야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해 왔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당장 벌떡 일어나고, 당장 효능이 있는 것들에만 관심을 쏟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호사와 영광이었습니다. 그 결과 가치라든지, 의미라든지, 보람이라든지 하는 개념들은 덜 떨어진 사람들이, 출셋길이 막히자 자기변명으로 늘어놓는 수작정도로만 생각해 버린 것입니다. 이런 행태는 교회라고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당장 꼭짓점에 오르기 위해서라면, 해선 안 될 약속도, 푼 돈으로 마음을 도적질 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걸맞지도 않는 자리 약속까지 하는 타락을 서슴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경건의 모양새는 잘도 냅니다. 하나님의 면전이 부끄럽지도 두려울 리도 없는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 어디 심판이 두렵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현상이 한국 개신교 안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현실이라는 것이 슬프게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그 아침이 오리라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우리가 들어야 할 분명한 이유입니다.

 

3. 오늘은 매 학기마다의 행사로, 루터대학교 신학대학원생들을 초청해서 한 시간의 강의(설교 계획)와 저녁 식사를 공궤하려고 합니다. 그 분들의 꿈을 위해 작은 격려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