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고백과 일치한 삶을 위해서. / 마 22:1-14.
묵상자료 4586호(2013. 12. 6. 금요일).
시편 시 140:6-8.
찬송 209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말했다. “그러한 치료는 환자 자신의 손으로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매일 밤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의사가 진단을 내립니다. “병환 자체는 대단치 않으나 심한 망상에 사로잡히셔서 잠시도 주무시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걸 몰라서 진찰받은 게 아니지요. 답답한 나머지 그는 화를 내며 말합니다. “그것을 고치라는 말이다. 그 기억 속에서 슬픔의 뿌리를 뽑고, 두뇌에 새겨진 고통을 깨끗이 지워낼 방법을 모른다는 말인가? 모든 것을 깨끗이 잊게 하는 약을 써서 환자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위험한 것을 대번에 제거할 수는 없다는 말이냐?”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기억 속에서 슬픔의 뿌리를 뽑고, 두뇌에 새겨진 고통을 깨끗이 지우고,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위험한 것을 대번에 제거할 수 있는 약이 있다면, 얼마나 좋아요. 그러나 맥베드가 의사에게 그처럼 절망적으로 한탄 후로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런 약은 개발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맥베드의 슬픔과 고통은 죄책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의사에게 물은 것은 어떻게 하면 이 죄책감을 벗어던질 수 있느냐? 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의사는 단호했습니다. “그러한 치료는 환자 자신의 손으로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종류의 슬픔과 고통은 주위의 사람들에게 용기를 얻어서 이겨낼 수도 있고, 세월이 흐르면서 희미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결정적인 슬픔과 고통은, 스스로가 아니면 치료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다른 누군가에게 무엇엔가 기대어 견디고 싶은 사람에게는 좀 매정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러한 치료는 환자 자신의 손으로 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리고 많은 삶의 전환점이 바로 그 지점, 먼 길을 돌아 이제야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깨닫고 알고, 상처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릴 때, 이루어집니다. 아무리 뛰어난 의사와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한들, 그 어떤 마음의 상처도 당사자의 연민 없이는 치유될 수 없습니다. 맥베드가 영웅인 이유는 그 연민에 조차 유혹되지 않고, 죄책감이라는 자신의 상처를 피하지도 치료하려 들지도 않았으며, 끝까지 정면으로 맞섰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비극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3년 11월 28일 방송>
2. 천국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어느 혼인잔치로 비유된 천국은, 낯설기도 하고 친근하기도 합니다. 혼인잔치에 손님을 초대하는데, 불특정 다수에게 뿌리듯 보내는 초청장이 아니라, 혼주가 비용을 다 떠맡는 혼인잔치로, 특별한 이웃들에게만 초청장이 전해집니다. 그리고 구두로 혹은 답신으로 참가여부를 확인합니다. 그렇게 해서 맞춤 혼인잔치를 준비하게 됩니다. 그런데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런저런 핑계로 혼인잔치에 참석치 않게 됩니다. 그 사실을 혼인 당일에야 알게 되어, 당황한 혼주는 종들을 보내어 사람들을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불러들입니다. 길거리나 시장어구나 이웃집을 찾아다니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겨우 혼인잔치자리가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혼주는 잔치에 참석한 축하객들을 둘러보고는,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의 손과 발을 묶어서 내 쫓습니다. 그러면서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고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누구나 혼인잔치에 초대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혼인잔치에 참석하려고 한다면, 최소한의 예절은 갖추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만한 최소한의 예절이란 무엇일까요?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원리에 따른다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의 옷을 입는 일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신앙의 옷을 차려 입고 살고 있는 걸까 자문해 봐야 하겠습니다. 입술에 머무는 가벼운 신앙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다운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고백과 삶이 일치한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저는 그것을 루터의 말을 빌려 “날마다 세례를 기억하는 삶”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죄에 대해서 싸워 죽고, 의에 대해서 다시 새롭게 살아나는 생활 말입니다. 세례를 기억하는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