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양과 염소의 비유가 가르치는 교훈. / 마 25:31-46.

박성완 2019. 5. 28. 01:51

묵상자료 4601(2013. 12. 21. 토요일).

시편 시 145:10-13.

찬송 37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말했다. “아스팔트에서도 백합꽃이 피어날 수 있으리라 믿고, 열심히 물을 뿌릴 수 있는 인간은 시인과 성자뿐이 아닐까?” 영국의 작가 윌리엄 서머셋 모음이 소설 [달과 6펜스]에서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의 입을 빌어 했던 말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물을 준들, 과연 아스팔트에서 백합꽃이 필 수 있을까요? 고목나무에 꽃이 피랴 는 우리 속담을 떠올리게 합니다. 어리석은 믿음이며 헛된 노력이지요. 불가능한 꿈입니다. 아니 설령 가능하다 할지라도 언제 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최소 비용에 의한 최대 생산을 올려야 하는 경제적 효율의 법칙에 어긋납니다. 기약 없는 일에 한없이 매달리는 건 미련한 짓이지요. 대다수의 영리한 사람들은 시작은커녕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작가는 그럴 수 있는 인간이 시인과 성자뿐이라고 했습니다. 시인과 성자는 이상향을 꿈꾸는 사람들이고, 그 세상을 이상향으로 만들고 싶은 꿈을 가진 사람들이지요. 그들이 하는 말은 한결같이 아스팔트에 열심히 물을 주면 백합꽃이 필거라는 말과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잠시 상상해 봅니다. 정말로 아스팔트에 백합꽃이 핀다면, 근사하고 멋질 것 같습니다. 뒤이어 아, 정말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세상이 가슴 속에서 펼쳐집니다. 매일 대가없는 일을 하면서도 스스로 행복해 하고,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그들을 보면서, , 저렇게도 살 수 있구나, 세상은 다른 삶의 방식이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뜹니다. 비록 지금 당장 내가 시인이나 성자처럼 뭘 어떻게 수 없을지 몰라도, 지금의 현실이 팍팍하게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곧 깨닫습니다. 시인과 성자가 씨앗을 뿌리고 열심히 물을 줬던 아스팔트란, 다름 아닌 바로 우리들의 가슴이었다는 사실을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31212일 방송>

 

2. 제가 읽는 성경책은 <심판의 표준과 근거>라는 표제어를 붙이고 있는 본문이었습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로 명명되곤 하는 오늘의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이 막연한 하나님만의 잣대가 아니라, 우리들이 충분히 소개받은 매우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음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는 오해하며 살아온 두 그룹이 등장합니다. 한 그룹은 양의 자리에 앉게 될 사람들인데, 그들의 오해는 매우 인도적인 혹은 인간적인 자세로 살았을 뿐, 그게 주님과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을 보았을 때 동정심이 생겨 먹던 것을 좀 나누어 주었을 뿐이고, 남루한 옷차림의 사람에게는 자신의 옷 하나를 걸쳐 준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였고, 옥에 갇힌 이를 보면 찾아가서 따뜻한 눈길 한번 주는 것이 전부였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도와줄 수가 없어서 언제나 미안하고 마음 아픈 사람이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걸 엄청나게 잘 한 일이라고 칭찬합니다. 주님 당신이 똑 같은 위로와 기쁨을 얻은 듯 말입니다.

   두 번째 그룹은 염소의 자리에 얻게 될 사람들로, 그들은 배고픈 사람도 만났고, 병든 사람도 옥에 갇힌 사람도 헐벗은 사람도 만났지만, 그들을 돕는 것은 국가나 사회사업가들이 할 일이지,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오해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무관심했고 돌보는 일에 태만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이런 문제들은 보다 근본적이고 제도적인 대책이 필요하고, 그런 것을 만드는 일에 힘쓰라고 칼럼도 쓰고, 마이크를 잡고 큰 소리를 쳤을지 모릅니다. 그도 아니면 그런 문제는 순전히 게으르고 시대를 분별치 못하는 어리석음에 기인한다고 생각하고, 덜떨어진 사람쯤으로 방치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오해는 주님 앞에서 통렬하게 비판을 면할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행동이 나에게 하지 않은 비정함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마음은 온통 이런 사람들에게 사랑과 동정 이해와 연민을 갖고 있다고 말입니다. 자칫 사회사업가처럼 살아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의 대답은 이웃에 대해서 연민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하지요. 연민(compassion),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 마음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