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높아지려 말고 낮아져야 한다. / 눅 9:37-50.

박성완 2019. 6. 1. 00:20

묵상자료 6589(2019. 6. 1. 토요일).

시편 14:5-7.

찬송 51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순간의 감정 상태를 확인하라. 안경에 감정이란 김이 너무 많이 서리지 않도록 하라.” 며칠 전 그녀는 영화 <러블 리스/Loveless>를 봤습니다. <러블 리스>는 안드레이 지비아긴체프 감독의 영화로 2017년의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장 상을 수상한 영화입니다. 이혼을 준비 중인 젊은 부부가, 열두 살 아들을 서로 상대에게 떠넘기려는데, 그걸 알게 된 아들이 사라지는 내용이었지요. 그러니 밝고 유쾌한 영화가 아닐 거라는 건 그녀도 짐작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짐작했어도 영화 속 젊은 부부를 지켜보는 건 참으로 고통스러웠습니다. 억지로 떠밀려서 한 결혼도 아닌데, 결혼에 대해서 두 사람이 주고받는 것들은, 모두 원망과 분노 증오와 모욕에 가득 찬 말다툼뿐이었지요. 자기감정 때문에 아이에게도 시종일관 상처 주는 말들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처지나 주위 상황을 빨리 정리하지 못한 채, 상대에게 원망과 책임회피와 미음의 감정을 쏟아 내는 일이야 말로, 제 안경을 자신의 앞날을 스스로 흐리게 만드는 얼마나 어리석고 험한 일인지. 사랑 없는 마음으로 사는 건 정말 큰 잘못이라는 걸 생각하면서, 그녀는 영화관을 나서면서, 정신과 의사 꾸뻬씨가 들려주는 <꾸뻬씨의 핑크색 안경>의 한 마디, “그 순간의 감정 상태를 확인하라. 안경에 감정이란 김이 너무 많이 서리지 않도록 하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 한마디를 되새겨 봅니다. <KBS FM 1 가정음악 2019. 5. 26. 방송>

 

2. “악령에게 사로잡힌 아이(37-43)”, “수난에 대한 두 번째 예고(44-45)”, “누가 제일 높으냐?(46-48)” 그리고 반대하지 않는 사람(49-50)”을 읽었습니다. 네 가지 말씀들은 서로 연관성이 낮다는 점에서 한 자리에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따로 하신 말씀을 묶었다고 생각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느 것이든 하나만을 묵상하는 것이 지혜로울 듯합니다. 오늘은 세 번째 말씀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누가 제일 높으냐?”는 주제는 매우 유치한 것이면서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는 주제임에 분명합니다. 요즘 미국이 세계 기후 변화에 대한 자세나 미중 무역전쟁을 보면, 이런 유치찬란한 제일주의를 엿볼 수 있습니다. “나보다 힘센 사람 있으면 나와 봐!” 하는 식으로, 세계 질서와 세계의 미래에 대해서 좌고우면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현상은, 이런 미국 제일주의를 유감없이 느끼게 해 주고 있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일주의는 모든 인간들의 내면에 깊게 뿌리 내리고 있는 매우 분명한 실상이라고 하겠습니다. 가장 큰 나라 가장 힘이 있는 나라에 대한 열망은, 사실은 모든 개인들에게서 출발한 것이라고 진단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가장 많이 들었던 어른들의 말씀은, 대통령이 되라 대장이 되라 등등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도 그럼 누가 백성이 될까 하고 의문을 갖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매우 일반적이고 자연스러운 사회 현상에 대해서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기본 신앙이란 최고가 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낮아지는 일이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그런 삶을 지향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말구유에 태어나신 일이며, 평생을 가장 낮은 신분의 사람들을 이웃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격적으로 그들을 대하셨음을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은 더 이상 제일주의나 중앙주의처럼 세속적인 출세주의나 성공주의를 지지하지 않고, 그와는 정반대로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 낮아지는 일이고 섬기는 일이며, 희생하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교회는 잘못 가르쳐도 한참 잘못 가르치고 있다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