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몹시 힘들겠지만 행동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 눅 16:19-31.

박성완 2019. 6. 29. 00:13

묵상자료 6617(2019. 6. 29. 토요일).

시편 19:9-11.

찬송 51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 둘 셋 넷, 입 안에 머금은 커피 한 모금을 목으로 넘긴 뒤, 남자는 눈을 감고 가만히 속으로 수자를 세기 시작합니다. 스물여덟 스물아홉 서른. 남자는 그제야 눈을 뜨고 눈앞에 놓인 커피 잔을 들어 다시 한 번 커피 향을 맡아봅니다. 어느 카페에서 본 커피를 마시는 법을 그대로 따라 해본 겁니다. 첫 모금을 마신 뒤에는 서른을 셀 때까지 가만히 그 맛과 향에 집중해 보라는 말. 그렇게 하면 커피가 가진 맛과 향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건데요. 그 글을 읽으면서 남자는 지금까지 자신이 커피를 마시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커피는 따뜻할 때 마시는 거라면서 후후 불어가며 한 모금 두 모금 찻잔 바닥이보일 때까지 한꺼번에 마셔버리거나, 요즘 같은 더위에는 얼음 잔뜩 넣은 아이스커피를 주문해 그야말로 단숨에 꿀꺽꿀꺽 들이마시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카페에 들어설 때부터 코끝에 감돌던 커피 향을 재대로 누려본 일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첫 모금 후에는 서른을 셀 때까지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있는 동안만이라도, 속으로 숫자를 세 보는 그런 느긋한 마음을 가져보자고 생각하는 보통의 아침입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9628일 방송>

 

2. “부자와 나사로(19-31)”을 읽었습니다. 천국의 삶의 모습을 얘기한 매우 귀한 자료입니다. 안타깝게도 성경에는 천국 얘기가 매우 빈약합니다. 계시록에서 말씀하는 내용은 거의가 환상적인 것이어서 해석하기도 어렵지만, 이해도 제 각각입니다. 오죽하면 루터나 칼뱅 당시에 900가지 해석이 있었다고 할까요? 그러니 기독교인들이 하는 이런저런 천국 얘기는 주로 불교나 민간 신앙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신화 같은 내용들이 전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천국을 엿보게 하는 매우 중요한 자료입니다. 이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는 이 세상과 천국이 불연속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선상에서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첫 번째 주제이고, 두 번째 주제는 제대로 된 예언자(지도자)의 가르침을 잘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나사로는 적어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시대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진 인물처럼 보입니다. 사실 이런 사람은 세상에 흔해빠졌습니다. 종기투성이로 살아가는 거지였습니다. 그에 비해 부자는 좋은 옷에 매일 잔치를 벌이는 등 호화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평생을 그렇게 살다가 결국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그들의 처지가 역전이 된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서 아브라함 품에서 지내게 되었고, 부자는 물 한 방울이 애타게 그리운 지옥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모습 아닙니까? 불쌍한 이웃을 도울 수 있는 기회가 많고 많았지만 그들을 외면하며 혼자 잘 먹고 잘 살았으니, 천국엔 있을 자리가 없었으니 말입니다. 물 한 방울을 구하는 부자에게 아브라함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있어서 오갈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부자는 자기처럼 살게 될 자식들이 걱정되어, 나사로를 땅에 특사로 파견 경고를 하도록 부탁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거기에는 깨우쳐 줄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런 걱정을 말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들리십니까? 이 말씀을 읽으며 권선징악이나 도덕론을 강조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것은 사람으로서 기본적인 일이지 천국을 위한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나사로가 한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절망의 시간을 살면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삶을 살 수 밖이었을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귀한 천국의 삶은 없었던 것입니다. 땅에서 살고 있지만, 이미 하늘을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 속에 끼이지도 못한다면, “믿습니다.”를 아무리 열창해도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사랑 제일 교회>는 사랑이 메말라 있고 증오만 넘칩니다. <섬김 제일 교회>는 탐욕만 가득합니다. 여전히 주시옵소서!”가 판을 치고 있을 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말이 아니라 삶이었습니다. 탐욕에서 빠져나와, 우리 시대의 나사로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시편 교독을 할 때 셀라를 읽는 분들이 있습니다. 시편에 71회 하박국에 3회 나오는 단어로, 뜻은 분명치 않고 노래하는 자는 가만히 있고, 연주자만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