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고 싶은 석미섭 양.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마흔을 막 넘긴 어느 날이었다. 나의 현역 시절은 설교를 준비하거나 심방을 하는 일이 일과인지라, 굳이 출퇴근 시간에 대중교통을 이용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10시가 조금 넘거나 아니면 오후 서너 시쯤 해서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해서 서점이나 시장을 보러 나갔다. 그런데 어느 날 늦은 아침에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그녀를 만난 것이다. 후에 알게 됐지만 나이는 나보다 아홉 살이 어린 그녀는 매일 이른 아침에 남대문 시장에 나가서 업무를 마치고, 오후 6시경 땅거미가 드리울 때 집으로 돌아오곤 하는데, 언제나 내가 사는 옥수동루터교회를 종점으로 하는 버스를 이용하였다. 내가 처음 미섭 양을 만났을 때는 버스가 종점에 닿았고 손님들이 내리는 중이었다. 나는 느긋한 마음으로 천천히 내리고 있는데, 내 바로 앞에 있던 미섭 양이 목발을 짚고 버스 계단을 내려오는데, 매우 힘들어 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우리처럼 발바닥을 딛는 게 아니라, 발가락으로 딛고 두 목발에 의지해서 한 발 한 발 힘겹게 걷고 있었다. 얼굴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발가락으로 걷고 목발에 의지해야 하니까 넘어지는 것이 일상이었을 것이다. 나는 측은지심이 생겼고, 목사라는 내 신분에 맞게 그녀를 엎는 것이 맞다 생각하고 엎이라고 채근했다. 몇 번을 사양하던 그녀는 내 등에 엎여서 우리 집에서 약 200미터 떨어진 그녀가 살고 있는 <정양원>이란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 일이 있고나서 맞는 추석에 내 성경공부 반의(1984년 현대그룹 본사에 성경 반을 개설 나를 강사로 초청했다) 학생 중 하나인 중앙정보부 과장쯤으로 일하는 분이, 어려운 학생을 도와달라는 부탁으로 한 학생을 분기별로 학비를 전해주고 있었는데, 그해 추석은 어려운 가정을 도와주면 감사하겠다고 7만원을 내게 맡겼다. 그 돈을 받아든 나는 먼저 석 미섭을 떠올렸다. 심방 겸 찾아가서 그녀의 사정을 알아보리라 생각한 것이다.
물론 그녀가 남대문 시장에 일하러 나간 틈을 이용하였는데, 그녀는 남대문 시장에서 껌을 팔고 있다고 했다. 서른한 살이나 된 숙녀가 목발에 의지해서 껌팔이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모친으로부터 들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내가 내민 70,000원을 한사코 거부하는 것이다. 거지도 자존심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돌아서서 나오는 내 등에다 비수를 던지는 한 마디를 했다. 명절을 맞아 광고용으로 선행을 하고 얼마나 우려먹을 것이냐는 것이다. 화가 났다. 성큼 손을 내밀고 감사합니다 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내민 손이 부끄러울 뿐 아니라 쫓기듯 나오게 되었으니, 나도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했다. 그래서 되돌아섰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그러자 그 모친은 마음속에 담아둔 말을 풀어 헤치기 시작했다. 저 불쌍한 년을 계속 남대문 시장에 내 보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저런 장애자에게 걸맞는 일자리를 만들어 달라는 요구였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그녀에게 알맞은 일터는 토큰 판매대를 길가에 하나 설치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노력하기로 약속한 후 겨우 위문금을 전하고 집으로 올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동 사무소, 구청 등으로 토큰 판매대를 알아보려고 많이 뛰어다녔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은 88올림픽을 앞두고 장애인이 시장에서 구걸하는 행위를 하도록 방치할 수는 없지 않으냐는 취지로 구청장에게 호소문을 보낸 후였다. 그런데 결국 돌아온 답은, 토큰 판매대가 길거리에서 가게 안으로 옮기는 중이어서 가게를 하나 얻으면 힘써보겠다는 내용이었다. 미섭이네 형편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1985년 시절에 길가에 그것도 버스 정류장 부근에 가게를 얻어줄 수 있다니,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다른 방법으로 미섭이 가정을 돕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모친과의 많은 대화 끝에 미섭이 아버지가 의병제대를 했는데, 아직도 대퇴부에 총알이 박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보훈 가족으로 등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보훈대상자가 된다면 국가가 집도 마련해 주고 최소한의 생활비도 보조해 준다는 말을 들은 터라, 그래서 보훈가족 만들어주기 작업을 시작했다. 먼저 탄원서를 냈다. 정부 종합청사 민원실에 낸 것이다. 한 일주일 쯤 되어 반가운 답신이 왔다. 해당 부서에 공문을 내려 보냈으니 일주일 안에 연락이 올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사흘이 안 되어서 미섭이 모친이 나를 찾아왔다. 서울 보훈청에서 직원이 전화를 해 왔는데, 왜 목사를 끼고 탄원서를 냈냐는 질책이었다고 한다. 지금 순서가 되지 않아서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되는데, 그걸 못 참고 난리 법석을 떠느냐는 전화였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다친 지가 30년이 넘었는데도, 지금까지 아직 순서가 밀려있다는 말만 되풀이 해온 서울 보훈처에서, 조용히 더 기다려달라는 말을 하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래서 내가 화가 났다. 곧 바로 서울 보훈청장에게 항의성 공문을 만들어 내용증명으로 보냈다. 나는 일개 목사에 불과하지만, 언제나 교회 공문서식을 이용해서 호소문이나 탄원서를 보내곤 하는데, 그것이 일종의 압력을 느끼는 수단이 됐던 모양이다. 내가 보낸 항의서를 받은 그들은 곧 바로 건강 검진을 받게 하는 것을 시작으로, 일사천리로 보훈가족 만들기에 돌입해서 불과 한 달도 안 돼서 약속을 받을 수 있었다. 일산에 보훈가족 아파트가 완성되면 한 채를 줄 것이고, 다음 달부터 보훈 연금을 받도록 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한 보훈가족을 도울 수 있었는데, 그것으로 끝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정확히 <88 서울 올림픽>이 있기 전에 그 가족은 보훈연금을 받게 되었고, 아파트 분양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석미섭 가정에는 은행에 다니는 여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가족 부양 능력이 있는 자녀가 있으면 우선순위에서 밀린다는 규정이 있다고 했다. 물론 보훈처는 크게 잘못했다. 이 규정 하나만을 이유로 30년을 기다리게 한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미섭이 부친보다 훨씬 경증(輕症)인 사람도 벌써 보훈가족의 혜택을 누리고 있었는데, 미섭이 부친이 바보 천치가 돼 있어서 그걸 기화로 무시한 것이었다. 육군 대위로 의병 예편했다는데도, 말도 어눌하고 걸음은 대퇴부에 박힌 총알 때문에 굼떴다. 그러니 자기주장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보훈 가족이 되고 나니 여러 가지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 하나가 잠실 종합 운동장 건너편에 위치한 강남 병원에서 미섭이가 정기적으로 치료를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발가락과 발바닥 치료를 시작했는데, 시간은 걸리지만 훨씬 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낭보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몇 달 뒤에는 미섭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는데, 병원 치료를 더 이상 받을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보훈 가족 중 재산을 가진 사람은 보훈가족에게 주는 병원 치료 혜택을 줄 수 없게 되어 있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자신의 희망이 물거품이 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모친이 전화를 걸어왔다. 미섭이가 껌을 팔아 신림동에 8평짜리 단독 주택을 소유하고 있어서, 자신들이 보훈가족 아파트를 가지려면 미섭이가 가진 집 때문에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차선의 방법은 미섭이를 가족에서 떼어내는 것이라고 한다. 마치 시집 간 것처럼 주민등록부상에서 동거인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미섭이는 가족에게 제외되었고, 그때부터 미섭과 가족들 사이에는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내가 무엇이라고 조언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가족들은 내가 미섭이를 부추겨서 가족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 생각하고 있었다. 하루는 은행에 다닌다는 여동생이 전화에 대고 눈물로 호소하였다. 그리고 말미에는 저희 가족을 도와주신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이제는 빠져달라고 간곡히 호소한다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보훈 가족 대접을 받을 수 없는 것이 그 8평짜리 주택의 소유권 때문이었다. 미섭이는 한사코 그 집을 팔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몇 달 뒤에 그 가족은 일산 어론가 이사를 갔다. 그리고 몇 차례 더 전화연락이 있은 후 지금껏 아무 연락을 못하고 있는 중이다. 누군가를 돕는 일은 참 보람 있는 일이다. 그러나 항상 보람만 있는 것이 아니란 것도 알았다. 배신감도 느끼게 되고, 듣지 말아야 할 욕도 숱하게 먹어야 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가끔은 미섭이가 생각난다. 지금 살아 있다면 예순 여섯이 되었는데, 비록 목발을 짚을 지라도 발바닥을 땅에 붙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간절함으로 미섭이를 위해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