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팝송 <해변의 길손>.
도봉산 산책은 은퇴 후에 생긴 나의 새로운 생활이 되었다. 도봉산 안내소에서 출발 왼쪽에 있는 다리를 건너 조금 오르면 황금 칠을 한 연화사가 나오고 절을 오른 편으로 끼고 조금만 더 오르면 내가 이름붙인 제1쉼터가 나온다. 벤치가 5개가 전부이지만, 나처럼 나이든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차를 마시며 얘기꽃을 피우는 곳이다. 그리고 조금 더 오르면 천년 고찰 도봉사가 나오고 거기서 조금 오르면 갈래길이 나오는데 왼쪽은 더 범위가 넓은 둘레길이 오른 쪽으로는 내가 걷는 제일 짧은 둘레길이 나온다. 그리고 조금 더 오르면 제2쉼터 정상 약수터가 나오는데, 거기서 다시 멈춰서 차를 마시거나 싸 들고 간 과일을 먹는다. 그리고 한참을 수다를 떨거나 다른 팀들의 수다를 듣다가 일어서서 나무 계단을 오르내리고 냇물을 건너서 아랫길로 내려오면 도봉 서원이 나오고, 조금 더 내려오면 쌍줄기 약수터 앞에서 줄을 서서 물을 떠가거나 마시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조금만 더 내려오면 새로 지은 절간인 광륜사가 나온다. 그리고 내가 도봉산에 갈 때마다 들리는 식당 <바숲>이 환영하는 노래를 큰 소리로 불러준다. 바숲은 바람이 숲을 깨운다는 뜻이란다.
오늘(2019. 6. 26) 나는 점심을 먹으러 <바숲>에 왔는데, 스물 세 살의 내가 육군 기갑학교 교육대대에 복무할 때, 기갑학교 병사 노래대항전에 나가서 불렀던 팝송 <Stranger on the shore>가 흘러나왔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주인에게 이 노래를 듣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얘기를 하였다. 그러자 주인은 다시 그 곡을 마치 신청곡을 들려주듯 틀어주는 게 아닌가? 그 노래는 당시로써는 고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한 내게 엄청난 힘과 용기를 준 노래였다. 나는 그때를 회상하면서 나도 몰래 눈물이 핑 돌았다.
어떻게 해서 내가 그 병사를 위한 노래대회에 나가게 됐는지는 기억이 전혀 나지 않지만, 아무튼 교육대대 작전정보과 교육사병으로 근무하던 내가 무대 위에 섰다. 물론 피아노 한 대도 없는 텅 빈 쓸쓸한 무대였고, 지금처럼 휴대폰으로 음원을 들으며 하는 노래도 아니었다. 무반주로 부르는 노래여서 오롯이 내 목소리 하나만 들렸을 것이다. 그래서 더 효과가 만점이었는지 모른다. <해변의 길손>은 내 성량에도 그리고 내 음색에도 잘 어울렸다. 가락과 가사가 나뿐만 아니라, 함께 복무하고 있던 병사들 모두에게도 딱 어울리는 거였는지 모른다.
여기 영어 가사와 번역 가사를 옮긴다.
Here I stand, watching the tide go out. So all alone and blue, just dreaming dreams of you.
I watched your ship as it sailed out to sea, taking all my dreams and taking all of me.
the sighing of the waves, the wailing of the wind. The tears my eyes burn, pleading, “my love return”
why, oh why must I go on like this? Shall I just be alonely stranger on the shore?
why, oh why must I go on like this? Shall I just be alonely stranger on the shore?
나 여기 서 있다네, 조수가 빠져 나가는 걸 지켜보면서. 혼자 아주 우울하게 너에 대한 꿈만 꾸면서.
바다로 항해를 떠나는 네 배를 지켜보았지. 내 모든 꿈을 싣고 내 모든 것을 싣고 가는.
파도의 한숨, 바람의 통곡. 불타는 내 눈의 눈물이 “내 사랑아 돌아와” 라고 애원해.
왜 난 이렇게 지내야만 하나? 난 단지 해변의 외로운 길손일 뿐일까?
왜 난 이렇게 지내야만 하나? 난 단지 해변의 외로운 길손일 뿐일까?
마지막 후렴부, “왜 난 이렇게 지내야만 하나? 난 단지 해변의 외로운 길손일 뿐일까?” 라는 물음이 당시의 나의 현실을 남김없이 투영하는 것 같았지만, 나를 슬픔의 계곡으로 끌고 가는 게 아니라, 도리어 내 안에 잠자는 가능성과 희망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는지 모른다. 내가 입대하게 되었을 때, 솔직히 나는 내게 실패만 가져다주는 현실이 너무 괴로웠기에 이런 세상으로부터 도망이라도 가듯 몸과 마음이 너무 가벼웠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충분히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열심히 훈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직접적으로는 멋진 논산 훈련소 25연대 우리 구대장님의 새벽 조회 시간에 하신 한 마디 “너의 조국은 춥다고 가슴을 움츠리고 손을 주머니에 넣는 패배자가 아니라,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활개 치며 걷는 용사를 원하고 있다.” 이었지만, 벌써 내 마음 속에서는 꿈틀 거리는 새 삶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당시로써는 아직 그런 용어가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으나, 군대생활 3년은 결코 내 인생 여정에서 지울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다 는 각오가, 카르페디엠을 따라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탱크 병사가 받게 되는 기갑학교 14주 교육을 받는 동안, 차량술, 통신술, 화기술 세 가지 분야 모두에서 최상위급 점수를 쌓아서 마침내 1등으로 졸업할 수 있었고 그해 첫 기갑 장군이 되신 장봉춘 준장의 우등 졸업표창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로 나는 매년 상무대 내 교육학교 대항 암호 풀이 경연대회에도 나가 매번 우승하고 부대 상을 받아 기갑학교장에게 바쳤다. 나는 2급 비밀을 내 조수는 3급 비밀을 풀었는데, 우리 둘은 찰떡궁합으로 잘 외웠고, 순발력을 발휘해서 잘 풀었다. 이런 저런 우승과 공훈으로 나는 매년 기갑학교 교장으로부터 공로패를 받았다. 그리고 포상 휴가도 몇 차례 다녀올 수 있었다. 내가 복무한 11전차 대대는 기갑학교 소속 교육 대대로, 전차 장교, 전차 하사관, 그리고 전차 병사들에게 실기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이었는데, 우리 부대에는 3개 중대와 본부 중대가 있었는데 내가 일하는 작전 정보과는 이런 교육을 직접 관할하고 있었고, 중대별 교육 평가를 내가 맡았는데, 이 때문에 낮은 점수를 받는 중대장들의 미움과 아첨을 동시에 받곤 하였다. 그러나 항상 성적대로 정확하고 정당한 근거를 바탕으로 평가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때 우리 작전 정보과의 과장은 절대적으로 나를 옹호해 주었고, 모든 외풍으로부터 보호해 주었다. 과장님은 부대대장과 계급이 같은 소령이었고, 작전관에는 대위 그리고 교육관은 중위가 맡았는데, 나중에 정보관이 한 분 더 왔는데 그 분은 소위였다. 공교롭게도 대부분의 장교들이 외국어 대학 출신 학군단 장교들이어서,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내게는 우호적이었고, 특히 과장은 나를 아끼고 사랑하셨다. 그분들 덕분에 내 업무가 끝나면, 언제든 사무실 안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지금도 <해변의 길손>의 잔잔한 멜로디가 들리면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에서는 거친 숨결이 느껴진다.
사족 : 가끔 전화도 주시고 도봉산이며, 실버 극장 등에서 만나기도 하는, 나보다는 열다섯 살 연배이신 한 지인 장로님이 내게 여러 번 부탁하셨다. 내 얘기가 참 흥미롭다며, 글로 남기면 어떻겠느냐고 말이다. 그래서 용기를 냈다. 그러나 내 딴엔 한 점 거짓 없이 써 보겠다고 생각한다. 가능하면 부정적이거나 어두운 역사는 쓰지 않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