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난 예고를 되풀이 말씀하시지만. / 눅 18:31-43.
묵상자료 6626호(2019. 7. 8. 월요일).
시편 22:1-2.
찬송 416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쩌다 보니 서로의 고민에 대해서 이야기가 시작된 자리. 회사에서의 고충, 집안에서의 외로움, 심한 경쟁으로 인한 상처. 이런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지금 봉사활동을 10년째 하고 있어. 봉사를 하다 보니 보람도 있고 좋은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왜 남한테는 이렇게 10년 동안 한결같이 친절한데, 내 가족한테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걸까? 왜 매번 바쁘다고 핑계만 대는 걸까?” 다들 같은 생각에 허를 찔리고,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 집니다. 봉사하는 10년 동안 늘 타인에게는 한결같이 친절했는데, 내 부모 내 가족에게는 왜 친절할 여유가 없었을까? 모두가 공감하는 불편한 물음이었습니다. 봉사 가서 할머니 할아버지들 좋아하시게 많이 웃고, 일 도와드리고, 휴대전화로 사진 보내드리는 법도 가르쳐드리고, 친절하게 일일이 설명해 드리는데, 가족에게는 그게 잘 안 되더라고. 밖에서는 늘 친절하지만 집에 가면 입을 닫게 되고, 가족이기 때문에 늘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한 것이 부끄러워졌다고 하네요. 하지만 그 마음 잘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사소하지만 대단한 일이 아닐까요? 투정만 부리던 부모님께 더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진짜 어른이 되는 순간이 아닐까, 생각해 보는 보통의 아침입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8년 8월 6일 방송>
2. “수난에 대한 세 번째 예고(31-34절)”과 “여리고의 소경(35-43절)”을 읽었습니다. 오늘은 첫 번째 단락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이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져 온갖 모욕을 받은 후에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될 것이고,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이것을 공관복음서는 수난 예고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결코 가볍지 않은 이 엄중한 말씀에 대해서 제자들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치 내가 오래 살 것 같지 않다. 아픈 데가 한 두곳이 아니니 죽은 게 어쩔 수 없는 일이지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귓등으로 듣는 자녀들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수난 예고를 하시는 것이 자녀들에게 주목을 받고 싶어하는 부모님의 어릿광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수난 예고를 여러 번 되풀이 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 첫째는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에 이르는 수난은 인류 구원을 위해 계획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단자 문선명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죽으심을 구원 계획에 차질이 생겨서 일어난 실패한 사례라고 지적했습니다. 죽지 않아야 참된 구세주라고 생각한 때문입니다. 둘째는 죄의 용서는 죽음이라는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가공할 위력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마지막은 사망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죄란 너무 흔한 우리의 삶의 모습인, “목표를 빗나간 모든 일”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셋째는 죽음 뒤에 부활의 새 시대가 열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의 공포가 시작됩니다. 이를 모르고 있거나 알면서도 눈을 감고 모른체 할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절망 속에서 살던 모든 인생들이 새로운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수난 예고를 더 이상 허투루 들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고난과 죽음을 시작으로 한다는 점과 죄의 냉혹한 형벌을 눈감아 주는 식으로 넘기지 않고 남김없이 다 대신하신 점, 그리고 죽음 뒤를 두려워하는 모든 인생들에게 부활의 새 아침을 열어주셨다는 점에서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처럼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만을 믿는 총론적(?) 신앙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각론적 신앙의 묘미를 느낄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수난 예고를 묵상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은총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