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2019. 8. 11. 성령강림절 후 아홉째 주일] 아브라함의 믿음과 의. / 창 15:1-6.

박성완 2019. 8. 11. 00:03

묵상자료 6660.

시편 29:10-11.

찬송 34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뻐서 인터넷으로 산 의자가, 앉을 때마다 삐거덕 삐걱 소리를 냅니다. 눈으로 봤을 땐 참 좋았는데, 앉을 때마다 몸과 귀가 불편합니다. 결국 앉기 위해 산 의자를 버리지 못하고, 한쪽에 밀어두고 쳐다보고만 있습니다. 일을 할 때도 가끔 그런 경우가 있지요. 일을 시작할 때의 목적을 잊고, 사소한 것에 함몰돼서 감정싸움이 되고, 그 싸움이 엉뚱한 결과를 손에 쥐게 하는 경우 말이지요. 가끔씩 뒤를 돌아봐야 한다는 말은 그래서 하는가 봅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19124일 방송>

 

2.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아홉째 주일로, 구약 본문인 창 15:1-6을 가지고 아브라함의 믿음과 의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을 말할 때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 모델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브라함을 선민(選民)의 조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불러낸 사람으로(에크 + 칼레오)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오해 속에 있는 것은 믿음을 의로 인정하는 진리입니다(6).

세기의 지성이라 불리는 버틀란트 러셀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에서, 여러 가지로 기독교의 교리와 그 교리를 따르는 기독교인들의 이율배반적인 삶을 비판합니다. 많은 부분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러셀 류의 생각이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도 의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안티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이 안고 있는 불의와 모순에 대해서, 그리고 겉과는 다른 사악한 기독교인들의 잘못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삶과 행위에서 구원을 찾으려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이란 인간의 의지와 행위에 대한 기대나 희망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연민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를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이룬 업적으로써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만을 의지하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평가로써 의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있는 진리입니다(1-3).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큰 차이는 그 기본 구도(構圖)가 다르다는 점입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일반 종교는 인간 자신의 지혜와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필연적으로 인간의 정성과 공()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마치 영생에 이르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완전히 타락한 인간이 무력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와 인간을 살려내신다는 내용입니다. 비판과 비난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를 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격을 믿은 믿음입니다. 물론 이런 위대한 믿음은 그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받은 것이었습니다(2:8).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신 것은 그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입니다(4-5).

자신을 의인이라고 자화자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의롭다는 말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인간에 대한 평가입니다. 그럼으로 어떤 인간도 스스로 의인의 자리에 오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의 자리에 불러 앉히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행위나 노력으로는 의로울 수 있는 길도 방법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해아래 인간은 한결같이 죄와 더불어 살고 있는 때문입니다. 죄를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수많은 위인들을 성경의 무대 위에 세웠는데, 모두가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던 사람들은 그 믿음을 의롭다고 평가하신 것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약속을 의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