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죽음이란 삶의 역할이 끝났다는 뜻 . / 삼하 12:15-31.

박성완 2019. 9. 7. 01:52

묵상자료 6687(2019. 9. 7. 토요일).

시편 34:17-19.

찬송 29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갖고 싶은 것을 늘 절반만 가질 수 있었던 여자가 있습니다. 그 때 여자의 소원은 갖고 싶은 것을 모두 가질 수 있는 현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갖고 싶은 걸 절반이라도 가질 수 있었던 그 시절을 여자는 그리워합니다. 지금은 아예 무언가를 갖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사치입니다. 예전에는 살던 집보다 더 큰 집에서 사는 게 소원이었는데, 지금은 전에 살던 집에서 살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녀의 사랑은 이런 때 찾아왔습니다. 아버지가 명예 퇴직한 돈으로 차린 음식점을 헐값에 팔고, 어머니가 평생 알뜰살뜰 모은 돈으로 장만한 집을 팔아야 했던 것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련만, 이상하게 사랑하는 남자 앞에만 있으면, 초라해진 집안 형편이 선명해 졌습니다. 아마 그 남자의 집안과 자신의 집안이 수평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일 겁니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못나 보여서 싫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긍정적인 생각보다는 부정적인 생각이 더 크게 듭니다. 그래서 그녀의 사랑에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질투와 불신이 장애물이 아니라, 그녀 자신, 사랑하는 남자 앞에만 서면 초라해 지는 자신이 장애물이었습니다. 남자를 만나고 있을 때는 가슴이 설레지만, 남자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 올 때면, 그런 자신이 싫어서 헤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살던 집을 팔고 변두리로 전세를 얻어 이사 온 그녀를 만날 때마다, 꼬박꼬박 데려다 주는 남자의 마음이 아직은 여자의 흔들리는 마음을 꼭 붙잡아 줍니다. 하지만 이제 더는 초라해지지 않기로 했습니다. 더는 사랑하는 남자 몰래 다른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날은 각자 약속이 있어서 따로 지내기로 한 날이었습니다. 만나서 꼭 할 얘기가 있다는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그만 고등학교 동창회를 하고 있는 남자를 봤습니다. 순간 그녀는 밖으로 나갔습니다. 바로 그 때 얼굴이 화끈 달아 오른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남자가 달려왔습니다. 가을 하늘처럼 투명하고 맑은 얼굴로 서로의 약속 장소가 같았다는 우연의 일치를 기뻐하며, 그녀를 데리고 동창들이 모여 있는 자리로 갔습니다. 그리고 우렁찬 목소리로 친구들에게 그녀를 소개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야.”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5911일 방송>

 

2. “죄의 씨는 죽고 솔로몬이 태어나다(15-25)”암몬 수도 랍빠를 점령하다(26-31)”을 읽었습니다. 열흘 전에 배추 모종을 옮겨 심었는데, 더위에 녹아 없어지고 5-6개만 남아 있었습니다. 다시 모종을 사다가 옮겨 심었는데, 요즘 비가 조용히 내려서 잘 자랄 것 같습니다. 오늘은 첫 단락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어찌됐건 부모의 잘못으로 세상에 태어난 어린 아이가 중병에 걸려 왕의 눈물어린 애원 가운데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저는 할머니의 주검과 아버지의 주검을 목격한 이래로, 많은 주검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다는 것이나 가까운 가족의 죽음을 지켜만 볼 뿐이라는 무력감을 느낄 때처럼, 허망할 때는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세상을 호령하는 다윗 왕에게 그런 시련이 찾아온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 더욱 괴로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숨을 거두자 왕은 목욕을 하고 기름을 바르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야훼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음식을 먹었습니다. 너무 다른 두 모습일 수 있지만, 다윗은 주어진 현실에 충실한 것이었습니다. 그 한 마디가 우리의 가슴을 흔듭니다. “내가 굶는다고 죽은 아이가 돌아오겠소?”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과 밧세바에게 다시 아들을 주셨는데, 그가 솔로몬이었습니다. “야훼께서 사랑하는 아이란 뜻의 여디디야란 별호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풀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어떻게 관리하시는가 하는 물음말입니다. 악인도 선인도 자기 마음대로 살거나 죽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누구는 어린 아이시절에 누군가는 온갖 악행에도 불구하고 고종명(考終命-제명대로 살다 편안히 죽는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의 깨달음은 이렇습니다. 짧게 살건 오래 살건 그 사람의 선악이 기준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맡기신 역할을 다 했느냐의 여부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짧게 살았다고 악하다 말아야 하고, 오래 살았다 해서 선하다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 탄생시 베들레헴의 영아들이 죄 없이 죽어갔고, 이완용 같은 매국노는 68세까지 호의호식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세상에 보냄을 받았고, 그 임무를 마치면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세상을 떠나야 할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