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없는 편지

목회자로 첫 발을 내 디디려는 김 목사님께.

박성완 2019. 9. 20. 02:26

두 달이 넘게 산티아고 순례길을 잘 마치시고 건강하게 귀국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바쁜 와중에도 저를 찾아와 주시고 여러 가지 도전적인 말씀을 들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게도 많은 깨달음을 얻게 해 주신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말씀이 다 옳고 진정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편의상 목사님께서 해 주신 말씀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고, 

저의 의견을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다 생각해서 그렇게 해 보겠습니다.

 

1. 목사님은 즐겁게 예배를 드리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찬송이 즐겁고 기도가 진실하며, 설교가 위압적이지 않고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이 담겨있고, 성찬에서 벅찬 감격을 느끼고 하는 등을 말씀하실 때 제 정신이 화들짝 드는 것 같았습니다. 예배는 당연히 그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예배를 기대하고 교인들은 교회를 찾아오는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2. 팀 목회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함께 신학공부를 하셨던 띠 동갑쯤 되는 두 분 전도사님과 그리고 외국인 목사님과 함께 팀 목회를 구상하고 있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이나 성공회 교회를 비롯해서 다양한 교파의 목사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얼마나 멋진 아이디어 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큰 괴리가 존재하는 걸 심사 숙고하시기 바랍니다. 부부도 의견의 차이를 좁히지 못해서 다툴 때가 많고, 그러다가 헤어지고 싶다는 생각까지 드는 것이 현실입니다. 목회란 민주주의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좋은 친구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3. 교회 구성원을 지도자와 비 지도자로 구분하지 않는 진정한 교회 공동체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매우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하며 계속 연구하고 개선해 가야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말씀 속에는 교회 구성원의 평등원칙에는 동의하지만, 지도자가 없는 것에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예배에 교인들이 참여할 수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회도 기도도 찬송인도 등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설교나 성찬을 아무나 할 수는 없습니다. 이유는 자명합니다. 그런 역할들은 전문적인 신학적 교육을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권위의 문제도 될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 불가능한 때문입니다. 제가 선교지에서 많은 평신도 선교사들을 만났습니다. 그분들이 하는 고충 가운데 하나는 평신도로 성경을 읽고 예배를 대할 때와는 달리 선교사가 되고 나니까 신학적인 문제에 대해서 배우지 못한 것들이 마치 여기저기 큰 구멍이 난 옷을 입고 있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어느 유명 장로 선교사님은 평신도 선교사의 한계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막 기독교 신앙을 만나게 된 초신자들과의 대화를 상상해 보시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4. 사도 바울처럼 자급 목회를 지향하고 계심을 암시하셨습니다.

   저도 평생 소원이 복음을 돈으로 팔지 않고 무상으로 받았으니 무상으로 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제게도 그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32살의 아주 패기 넘치는 나이에 말입니다. 제가 부산 YWCA에서 성경반을 지도하고 있었는데 1달도 되지 않아서 유명한 성경 교사로 부상한 것입니다. 제 성경반의 학생이었던 부산의 어느 교육재벌 장로님의 사모님이 저를 찾아와서 제안을 했습니다. 교사들이 신앙적으로 전혀 훈련이 돼 있지 않아서 그들과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목 실장으로 모시고 싶다고 말입니다.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제안이었습니다. 교목실장의 연봉은 교감 수준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교목실장이라는 직업을 갖고, 자급 목회를 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곰곰히 생각해 보다가 정중하게 사양하였습니다. 교목 실장을 부실하게 할 수는 없을 테고, 하루 종일 교목 일에 전력투구하고 나면 체력이 고갈되어서 주일 예배며 수요기도회 금요 철야기도회 새벽기도회를 제대로 인도할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도 이번 여행에서 일기조차 쓰기 힘들 정도로 고단해서 노트북을 한국으로 보내셨다고 말씀하신 바로 그 대목이 정답입니다. 사도 바울 시대와는 너무 다른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세상도 교회도 훨씬 더 복잡해 진 것입니다.

 

5. 예배 후에는 자유스러운 토론 문화를 만들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예배의 내용이나 신앙생활을 발전 시키는데는 한 사람의 의지나 용기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구성원들이 합심하고 협력해야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토론의 장을 자주 만드는 것은 환영하고 환영합니다. 그런데 견디기 힘든 상황도 예상해야 합니다. 제 경우가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저는 교회 생활에 대해서 몇 차례 교인들의 의견을 묻는 설문서를 받아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 예배에서 좋은 점과 고쳤으면 하는 점, 설교에 대해서, 기도에 대해서, 찬송에 대해서 헌금에 대해서 등 등. 구체적으로 물었습니다. 그런데 몇 번으로 끝내고 말았습니다. 제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내용이었습니다. 가령 설교가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대목입니다. 교인들의 가려운 부분을 잘 긁어줘야 하고, 교인들의 간절한 소망을 외면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부흥회 강사에 버금가는 그런 현실적인 삶의 내용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더 힘든 것은 성령을 받으셨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방언이 저절로 흘러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 등입니다. 저는 교회 안에 토론 문화가 성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교 대상이 아닌 것들을 꺼내놓을 때 이해하고 다가서기는 커녕 자꾸만 멀어져 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6.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니면 사람의 저술인가? 라는 의문을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중요한 주제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신학교에서 귀가 닳도록 듣고 배우고 시험까지 치룬 문제입니다. 성경에 허술한 면이 많습니다. 앞 뒤가 맞지 않는 모순들이 그대로 담겨 있기도 합니다. 과연 천지를 단 6일만에 창조하셨을까 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다 하셨습니다. 진화론에도 들어야 할 말이 있지 않느냐고도 하셨습니다.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제가 이번 교단 정기 총회 개회 예배에서도 잠깐 언급하려는 내용입니다만, 우리 교회는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이냐 사람이냐로 교회가 둘로 갈라졌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부터 제기된 문제입니다. 기독론이란 신학이론으로 해결했다고 넘어갔습니다. 천년이 흐른 후 이번에는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믿음으로냐 선한 행실로냐의 구원론의 문제로 기독교회는 둘로 갈라졌습니다. 바로 종교개혁의 주제였습니다. 우리 교회는 율법과 복음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느냐로 이 문제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마지막 위기는 바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냐 사람의 말이냐의 문제앞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신학교에서는 정경화의 역사적 과정을 가르칩니다. 수많은 자료들 중에서 하나님의 구속사라는 한 줄기 흐름에 역행하지 않고 일조하고 있는 범위에서 정경으로 교회가 차용했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고백적인 일이지 절대로 합리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난처한 문제를 만날 때마다 그것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고백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역사적 증거 자료가 아니라 고백이라고 말입니다. 그럴 때 가장 힘을 발휘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문제점들을 발견합니다. 불교 경전처럼 필요한 교리만을 말하면 좋겠는데, 추잡스러운 얘기들까지 등장합니다. 세상에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자식을 낳는 얘기가 성경에 나오는가 하면, 새 어머니들을 자식이 범하는 그것도 백주에, 텐트를 치고 한 일이기는 하나 이런 비도덕적인 일들이 성경안에 등장합니다. 그 외에도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말도 안 되는 얘기들이 서슴지 않고 나옵니다. 그래도 저는 성경을 믿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 중의 하나를 말하라면, 그것이 우리 인간들의 삶의 내용이고 현실이라고 말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속살을 여과없이 털어내는 것 처럼 보이지만, 타산지석으로 삼으라 하신다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김 목사님. 

목회자로써 첫 발을 내 디디려는 목사님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설레이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두렵기도 한 길이 목회자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상앞에서는 결코 깨우칠 수 없는 것들이 많고 많습니다. 삶의 현실에 혹은 목회 현장에서 부딪혀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첫음에 가졌던 이른 바 초심을 잃지 않는다면, 존경받는 목회자로 존경은 아니더라도 괜찮은 목회자로 10년을 알뜰하게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드린 얘기가 전혀 엉뚱한 얘기로 들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짧은 생각이라고 너그럽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평화 !

 

박성완 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