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모를 꾸민 왕자 아도니야와 선지자 나단. / 왕상 1:1-27.
묵상자료 6703호(2019. 9. 23. 월요일).
시편 37:4-6.
찬송 294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이는 36, 전문직을 가지고 있고, 일곱 살과 다섯 살의 두 아이의 엄마, 외모도 출중해서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여자, 여자가 처음으로 오랜 세월 가슴에 묻어 둔 얘기들을 꺼냈습니다. 어릴 적 고등학교 선생님이셨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하셨답니다. 어머니가 생선 장사를 하시는데, 누가 부모님이 무엇을 하시느냐고 물으면, 아버지가 고등학교 선생님을 하시다가 돌아가셨다고 애매하게 둘러대곤 했습니다. 부모의 존재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어떤 고통이 따르던 여자도 그러려고 했을 것입니다. 여자에게 생선 장사를 하는 어머니의 존재는 숨기고 또 숨기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자의 어머니도 고등학교 선생님의 아내로 살아가고 싶었을 겁니다. 어쩌면 하나 밖에 없는 자식 때문에, 생선 장수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할 것은 잊은 채, 잊어야 할 것은 가슴에 꼭 끌어안은 채, 살아갑니다. 그러다 어느 날, 기억해야 할 것과 잊어야 할 것이 뒤 바뀔 때가 있습니다. 여자는 어제 갈치 한 상자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급하게 돈이 필요하다는 사람에게 선뜻 돈을 빌려 주었는데, 그 일이 고마워서 보낸 것 같았습니다. 갈치 상자 앞에서 여자는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어린 시절에 익숙해 있던 생선 비린내가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망설이던 여자는 갈치를 손질하기 시작했습니다. 갈치를 손질하는 내내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5년 9월 14일 방송>
2. “다윗의 마지막과 아도니야의 음모(1-10절)”과 “나단과 밧세바의 계책(11-27절)”을 읽었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궁금하고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바람직한 결혼 생활도 그렇고, 현명한 부모가 되기도 그렇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앞서 간 선배들의 삶을 추적해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자기 자신은 잘 보이지 않지만, 다른 사람은 너무나 잘 보이니 이것도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얼마 전 한 지인이 자신의 죽는 꿈을 꾸었다면서 제가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저는 죽는 꿈 대신 죽음에 대해서 생각이 많아졌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면서 저의 장례식을 제가 주관하고 싶다는 말도 했습니다. 의사선생이 이제 그만 살아도 된다고 선언을 하면 더 이상 아등바등하지 않고, 솔선해서 제 자신의 장례식을 만들어, 가족과 친구들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한 사람 한 사람 손을 잡고 고마웠다고, 덕분에 행복했다고 인사를 하고 이승에서의 모든 관계를 정리하려고 합니다. 그런 다음에 법이 허용하는 한 저의 육신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신체는 해부학 교실에서 1년 동안 사용하도록 하고, 1년 후에는 자녀들이 유골을 받아다 선산 부모님 곁에 묻어주라고 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 왕은 노년에 피가 식어 몸이 차가워지자, 신하들이 전국에서 어린 처녀를 하나 구해서 왕의 몸을 덥혀주는 일을 하게 했지만, 왕은 그 어린 여인과 몸을 섞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다윗의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왕이 될 속셈으로 병거와 호위병 50명을 사병으로 두었지만, 다윗은 참견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순서대로 하면 아도니야가 맨 앞자리에 있어서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옹호할 신하와 장군들을 포섭하기 위해서 총사령관 출신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음모를 하였는데, 제사장 사독, 예언자 나단, 다윗의 용사들인 시므이와 레이는 아도니야 편에 서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아도니야는 자신의 형제들과 왕자들 그리고 왕궁 관리들을 예루살렘 남쪽 힌놈의 골짜기와 기드론 골짜기가 만나는 곳인 엔로젤로 초대해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선지자 나단은 이일의 불의함과 위험에 대해서 다윗 왕에게 그만의 특유한 어조로 직고한 것입니다. 과연 아도니야의 행위가 왕의 뜻과 같은 일인가 하고 말입니다. 왕의 판단을 돕는 역할을 하고 있다 생각한 것이며, 왕이 생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일련의 행위는 또 다른 역모라 생각한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