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다윗 궁이 아니라, 기혼 샘에서 대관식을 치르다(?) / 왕상 1:32-53.

박성완 2019. 9. 24. 00:35

묵상자료 6704(2019. 9. 24. 화요일).

시편 37:7-9.

찬송 2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일상의 사물들을 새롭게 돌아보는 사물에게 말 걸기. 오늘의 사물은 <자동차>입니다. 자동차가 처음 우리나라의 길거리에 등장했던 1908년에, 충무로 거리의 풍경을 한 영국인 기자는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대로변을 지나가다 자동차를 처음 본 조선인들은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들고 가던 짐도 팽개친 채 숨기 바빴다. 어떤 사람은 이 쇠 기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 쇠당나귀 쇠귀신으로 드라이브를 하다가, 우리나라 최초로 자동차 사고를 낸 사람은, 이완용의 아들이었다고 하지요. 사고 피해자는 7살짜리 사내아이였는데, 당대 최고의 권세 가문으로부터 입은 사고였으니, 아이의 아버지는 그저 가슴만 칠 수밖에 없었다고. 우리나라의 자동차의 역사를 담은 책 [고종 캐딜락을 타다]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최무성 형제는 초창기에 외제 지프를 일일이 손으로 해체해 가면서 만드는 법을 배우는 식으로, 처음으로 국산 차를 만드는 데 성공하기도 했지요. 근대화에 대한 간절한 열망 하나로, 설계도나 기술도면 하나 없이, 그야말로 맨 손으로 우리만의 차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자동차는, 1970 1980년대만 해도 학교에서 생활환경 조사서 같은 것을 하면, 자동차 있는 집 한두 집에 불과했었지요. 이젠 집집마다 흔하게 소유하면서 점점 더 자동차로 움직이는 것도 세워놓은 것도 다 문제가 되는, 교통 정체와 주차난 시대의 주인공이 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생활반경을 크게 줄여주면서도, 정체된 길에서 시간을 낭비케 하는 모순된 존재가 돼 버린 자동차. 그럼에도 우리는 왜 자동차에 대한 애착과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걸까요<KBS FM 출발과 함께. 2010. 9. 24 방송>

 

2. “솔로몬이 다윗의 임명으로 왕이 됨(28-53)”을 읽었습니다. 권세를 두고는 부자지간에도 칼부림을 한다는 속담은 다윗 가문에서 현실로 나타난 이야기입니다.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이 정변을 일으켜 왕이 되고자 아버지를 왕궁에서 쫓아냈으나 결국 다윗의 군대에 패해서 죽고 말았고, 넷째 아들 아도니야 역시 왕권을 노리며 제사장과 군대 장관 등 진용을 갖추고 왕자들을 모아 잔치를 여는 등 자신의 세를 과시했으나, 다윗은 솔로몬을 그의 후계자로 지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장소로 예루살렘 동문 밖 기드론 골짜기의 기혼 샘(실로암의 물줄기의 근원)으로 정한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아직 성전을 짓기 전이어서 거룩한 샘으로 불리는 기혼 샘이 국가의 중대사를 치르는 장소로 쓰이곤 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평화로운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으나, 스스로 왕이 되고자 반란을 일으켰거나 그 같은 준비를 했던 무리들은 하루하루가 불안한 시간을 보내야 했을 것입니다. 아도니야는 솔로몬 왕을 찾아와 목숨을 구걸하는 제안을 하고 무사히 돌아갔습니다.

백성은 땅과 곡식이 없으면 살 수 없으므로 사직은 풍흉과 국가의 운명을 관장한다고 믿어, 나라를 창건한 자는 제일 먼저 왕가의 선조를 받드는 종묘(宗廟)와 더불어 사직단을 지어서 백성을 위하여 사직(社稷)에게 복을 비는 제사를 지냈습니다. ()는 땅을 관장하는 신이고, ()은 곡식을 관장하는 신이어서, 이들을 섬기는 것은 나라의 평안을 비는 기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농경문화는 방법을 달리할 뿐 어느 나라나 가진 토속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 역시 야훼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그들도 가나안 족들의 영향을 직간접으로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바알과 아세라를 섬긴 것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기혼 샘을 성스러운 샘으로 생각하며, 이런 저런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곳에서 솔로몬 왕의 대관식을 행한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꺼내는 까닭은 우리 기독교인들 역시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다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우상과 민간신앙 등에 물들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다양하고 무서운 이방신앙에도 불구하고 야훼 하나님만이 신들 중의 신이라는 점을 더욱 강조하고 의지할 일이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