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행복하십니까? 예.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느 주일 예배를 마치고 성도의 교제로 오찬을 나누는 자리에서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받았다.
"목사님은 행복하십니까?"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삼성에 취업해서 돈을 잘 번다고 그 분의 매형이 귀뜸한 젊은이였다.
"예. 그렇게 생각합니다." 엉겹결에 한 나의 대답이었다.
그 다음에 무슨 얘기가 오갔을까 짐작이 될 것이다.
자연스럽게 내가 행복한 이유를 말해야 했다.
그것은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나의 생각이 하나 둘 들춰졌다.
사실 내 삶은 언제나 고단하다.
아마도 태어나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분명한 현실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힘들었고,
아홉 남매 중 셋째로 살아야 했으니 힘들었다.
공부도 힘들게 했고, 가난한 아내와 결혼해서 세 자녀를 키워야 했으니 힘들었다.
물론 목회도 힘들게 했고, 교수직도 힘들게 했다.
신분이 상승한 적이 한번도 없었으니 힘들었고,
경제적으로 넉넉한 적이 없었으니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말을 주로 하는 사람으로 편도가 약해서 소리를 제대로 낼 수 없었으니 힘들고 힘들었다.
오늘까지 6,720회 묵상자료를 18년째 지인들에게 보내는 일도 힘들고,
은퇴후에는 작은 마을에 와서 촌장 노릇을 하는 것도 몹시 힘들다.
그리고 누구나 다 안고 있는 걱정도 해야 하고,
이런 저런 병치레를 하면서 살고 있으니 힘들고 힘들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행복하다니, 가당치 않는 일이고 위선적인 표현이 아닌가?
내가 생각하고 믿는 행복이란 삶의 과정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님을 설명해야 했다.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사는 과정은 힘들고
그래서 제때 월사금을 낼 수 없고 진학할 수 없었으니 힘들었다.
이런 저런 모든 일들이 태생적으로 힘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 준 말씀이 산상수훈의 팔복의 말씀이다.
팔복의 말씀은 과정과 함께 그 아름답고 멋진 목적을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그 목적 때문에 과정이 힘들어도 행복한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매일 한 편의 짧은 묵상을 18년동안 100명의 지인들에게 보내고 있다 말씀드렸다.
지금은 그 절반으로 줄어들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다른 방법으로 약 천명의 사람들이 내 묵상을 읽고 있다 한다.
내 얘기와 생각을 자신의 친구들에게 나누는 사람들 때문에 생긴 기적이다.
그래서 매일 성경을 읽고 신학책과 각종 전문서적들을 찾아 읽는다.
매우 힘든 일이다. 원어를 살피고 문장 구조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적절한 표현을 하기 위해서 단어를 선택하는데도 나름 신경을 쓴다.
그리고 좋은 글을 읽어주는 방송의 얘기를 받아 적어 나누기 위해서 하루에 1-2시간은 자판을 두들긴다.
이런 과정은 힘들기 짝이 없다.
그러나 하루도 빠짐없이 실천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런 과정을 통해서 얻게 되는 행복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힘들게 박사공부를 하는 친구의 아들이 내게 감사의 메일을 자주 보냈다.
박사 공부를 마치게 된다면 목사님의 도움이 크고 크다고 말이다.
그리고 박사 학위를 받던 날, 내게 동영상 메일 편지를 보냈다.
나는 몽골 울란바트로의 한 선교지에서 그의 메일을 읽었다.
한 셀러리 우먼은 매일 내 묵상자료를 직장 동료들과 함께 점심 식사 전에 둘러앉아서 읽는다 했다.
이런 이들에게 작은 기쁨과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아무리 과정은 힘들어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나는 작은 전원주택 단지에 서울의 전세집 값의 절반도 안되는 돈으로 집을 마련했다. 아들도 보탰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24세대의 작은 마을이다.
문제가 하루도 떠나지 않았었다. 법정 소송도 생겼고, 마을 사람들 사이에 분쟁도 생겼다.
그래서 최고 연장자로 그들을 돕고 싶었다. 물론 나를 돕는 일이기도 했다.
변호사를 만나는 일도, 시청에 가서 시장을 만나는 일도, 깡패 비슷한 사람들과 맞서 싸우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마을의 촌장으로 추대되었다.
하루도 시끄럽지 않은 문제가 없는 세상임을 배우고 또 배우고 있다.
마을 자체의 문제에 대한 <마을 규약>이나 <재정 관리 원칙>을 만드는 일이 필요해서 전체 동의를 얻어 만들었다.
그래서 마을이 합리적으로 굴러가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끊이지않는다. 남편과의 문제로 울면서 찾아오는 사람도 있고, 이웃과 불화하는 사람들도 여전하다.
그러나 내가 그들에게 작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로 살고 있는 것이 행복하다.
과정은 언제나 힘들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목적은 언제나 선하고 아름다우니 행복하다.
나는 목회가 힘들다며 찾아오는 제자들 그리고 후배들이 많은 편이다.
가능하면 내가 밥을 해 주기도 하고 밥을 사기도 한다. 더러는 얻어 먹기도 한다.
대체로 손해보는 장사다. 그러나 작은 도움을 줄 수 있으려니 해서 행복하다.
지금 매월 평균 세번의 주일에는 설교를 하는 교회들이 있다.
대체로 20명 안팤인데 아주 작은 교회들이다.
그들에게 찾아가서 듣고 싶은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이라 믿고 전하는데, 좋아들 하신다.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물론 과정은 한번도 수월한 적이 없다. 그러나 목적이 선하고 아름다우니 행복하다.
마음이 가난해 지려니 얼마나 힘들까? 그러나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행복하고 행복한 일이다.
슬퍼하려니 얼마나 힘들까? 그러나 반드시 위로을 받게 된다 하시니 행복하고 행복한 일이다.
온유한 마음으로 살라 하시니 얼마나 힘이들까? 그러나 몸 붙일 땅을 얻을 것이니 행복한 일이다.
과정은 힘들다. 그러나 선하고 아름다운 목적을 이루는 길이니 행복하고 행복한 일이다.
사람들은 과정에 질려버리는 것 같다.
열심히 공부하는 과정을 쏙 빼버리고 1등하기를 바란다. 도둑 심보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과정이 힘든 것은 결과가 행복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과정부터 행복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면서 나는 행복하기로 작정했다.
그렇게 살다보니까 근심 걱정을 하면서도 행복하다.
반드시 선하고 아름다운 목적이 다가오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행복하십니까?
예.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실 참으로 행복합니다.
2019년 10월 10일 아산 에이스벨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