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난제 풀이

3. 성경보다 설교가 더 어려워질 때.

박성완 2019. 10. 15. 06:04

대학엘 들어가서 하루는 역사신학을 가르치시는 교수님이 <기독교 사상>에서

당시 유명한 신학교수의 글을 복사해 오셨다. 

그리곤 물으셨다. 무슨 얘기를 하는 것 같으냐고 말이다.

그때 많은 것을 깨달았다. 쓸데없는 것들은 줄이고 줄여야 한다는 것을.

첫번째는 우리 말로 이해가 되는 낱말에 영어를 쓸 필요가 없다는 것.

두번째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사용하라는 것.

세번째는 독자나 청자의 마음을 깨우는 것에만 집중하라는 것 등이다.

 

얼마 전에 <나병환자 열 명이 깨끗함을 받다>는 눅 17:11-9의 본문으로 설교를 들었다.

제목은 "아홉명은 어디 있느냐?" 였다. 

성경 내용은 매우 평범한 이야기이다. 

열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을 만나 병을 고치게 되었는데, 

사마리아 출신 환자 한 명만 예수님께 찾아와 감사드렸다는 것이다. 

설교자가 키워드로 감사를 택한 것은 옳은 판단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찾아온 사마리아 출신 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게 더 분명하다.

반어법으로 감사하지 않았던 아홉명을 상대로 한다면 매우 복잡해 질 수 밖이다.

실제 설교에서는 그 아홉명의 변명거리들을 끌어들여서 열거하였으니 더 힘들어지고 말았다.

성경 내용에서는 전혀 암시조차 찾을 수 없는 아홉명의 변명들을 통해서 감사할 마음이 사라질 수 밖이었다.

 

나는 설교자들이 설교를 어렵게 하는 것에 대해서 늘 불만이 많았다.

차라리 성경을 읽는 것 만으로 훨씬 더 좋은 깨우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성경에서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이상한 얘기를 가져와서 머리를 혼란시키니 말이다.

 

이 설교는 사마리아 출신 나병환자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면 감사가 무엇인지, 왜 감사할 수 밖에 없는지를 명쾌하게 깨우칠 수 있다.

이 본문에는 매우 귀중한 한 마디 암시가 있다. 설교자가 반드시 찾아야 할 낱말이다.

바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 아홉은 당연히 유다 사람들이다. 

사마리아 사람은 유다 사회에서 적어도 700여년 동안 차별을 받아온 사람들이다.

그래서 모든 면에서 당연히 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었다.

심지어 예수님의 말씀을 곁에서 들을 수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차별받는 삶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고, 

예수님께 고침을 받는 행운 중의 행운을 얻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이 깨끗함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런 행운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넘치고 넘치는 은총이라는 말 외에는 다른 말이 있을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 은총을 온 몸으로 받은 사람이 잠잠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달려왔고,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이와는 반대로 다른 아홉의 나병 환자들은 유다인으로 당연히 받을 것을 받았다 생각했다.

자신들에게 그런 특혜를 받을 충분한 권리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설교자가 이 점을 파악했다면 당연히와 당연하지 않은 것의 차이를 이해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당연하지 않은 자들인 것을 일깨우고,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감사와 감격을 느끼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당연하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당연하지 않은 삶에 오신 주님의 은총을 깨닫고 있는가? 

 

설교를 할 때 성경보다 더 어려워질 것 같아 보이면,

성경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한다.

어려운 설교 때문에 성경까지 어렵게 느끼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