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기

<길은 멀어도 마음만은/ Un rayo de luz>.

박성완 2019. 11. 2. 07:43

옛 허리우드 극장에는 실버 극장과 낭만 극장 둘이 나란히 있다.

근사하게 차려입은 노신사와 노숙녀들은 물론, 노숙자 수준의 노인들도 간혹 눈에 띈다. 

그러나 자신들의 젊은 날을 회상하기에 딱 좋은 50, 60년대 영화들이 사흘 간격으로 상영되고 있으니 어찌 이를 탓하랴?

 

은퇴후 내 생활의 일부가 된 영화 감상은 내 노년기를 얼마나 충실하게 채워주는지 모른다.

오늘은 1960년 스페인영화 <길은 멀어도 마음만은/ Un rayo de luz>을 택했다. 

 

50-60년대 스페인에는 우렁찬 목소리를 자랑하는 두 명의 가수겸 배우인 꼬마 소년 소녀가 있었는데 바로 호셀리토와 마리솔이다. 둘은 어린 나이에도 각각 우렁찬 성량으로 노래와 연기를 하며 인기를 모았다. 그 중 마리솔이 주연한 영화 <길은 멀어도 마음만은>은 우리나라에 두 번이나 개봉될 정도로 인기를 모았던 작품이다. 1960년 작품이며 이 영화에서 마리솔은 10살된 소녀로 출연하여 웃고 울리는 연기로 관객을 감동시킨다.

 

<길은 멀어도 마음만은>은 유명한 동화 <소공자>의 소녀판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귀족과 사귄 가난한 여성이 사고로 사랑하는 남자를 잃고 대신 그의 분신인 아이를 임신하여 혼자 낳아 기르게 되고, 세월이 흘러 타국에 있는 지체높은 귀족인 아이의 할아버지가 아이를 부르게 되고, 아이는 괴팍하고 완고한 할아버지를 만나 손녀딸의 재롱을 보여주며 할아버지의 마음을 돌려놓고 다 같이 행복을 찾는다는 이야기이다.

 

영락없이 <소공자> 이야기의 재판이다. 소공자는 미국의 가난한 소년이 영국의 할아버지에게 가는 내용으로 좀 더 먼 거리인데 <길은 멀어도 마음만은>은 스페인의 어머니로부터 이탈리아에 사는 할아버지에게 가는 내용으로 약간 더 가까운 거리라는 점이 다르다. 그 대신 마리솔의 경쾌한 노래들이 많이 흘러나오는 것이 영화의 볼거리이다.

 

스페인의 연극배우인 엘레나(마리아 마호르)는 이탈리아 백작의 아들 카를로스(안토니와 몰리노 노조)와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신분의 차이로 고민한다. 카를로스는 아버지인 안젤로 백작(훌리오 산주앙) 에게 승낙을 받기 위해 이탈리아행 비행기를 타지만, 비행기가 추락하여 전원이 사망한다. 카를로스의 동생 파블로(안셀모 두아르테)는 형의 유품을 받으러 왔다가 엘레나의 존재를 알게 된다. 카를로스의 아이를 임신한 엘레나는 아이를 낳고 마리솔이라 이름을 짓고 혼자 키운다. 10살이 된 마리솔, 3개월간 겨울방학을 앞두고 오랜만에 삼촌 파블로가 찾아와 마리솔을 방학동안 이탈리아에 데려가겠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안젤로 백작은 스페인에 있는 얼굴도 모르는 손녀딸과 10년만에 첫 대면을 하게 된다.

 

군인 출신으로 엄격하고 완고한 안젤로 백작, 장남이 사고로 죽은 뒤 그 커다란 저택에는 오래도록 웃음이 사라진 상태였지만 마리솔이 도착하고, 마리솔은 특유의 낙천적이고 발랄한 모습으로 할아버지 안젤로 백작을 즐겁게 한다. 완고하던 안젤로 백작도 마리솔을 통해 웃음을 되찾고 이웃 어린이들에게도 자상한 할아버지가 된다. 어느덧 마리솔 없이는 살 수 없게 된 백작은 자신의 여생에 마지막 희망이자 기쁨인 마리솔과 평생 함께 하고 싶어서 방학이 끝난 후에도 계속 머무르게 할 생각을 한다. 하지만 스페인의 가난한 여성인 며느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마리솔은 엄마를 보고 싶어 하고 그런 마리솔의 행동에 배신감을 느낀 백작은 별장으로 떠나고 마리솔은 엄마에게 돌아온다. 엘레나는 마리솔을 반가워하지만 집도 없이 지인의 집에 얹혀 사는 자신의 처지때문에 괴로워한다. 마리솔에게 화를 냈지만 내심 너무 보고 싶어하던 백작은 마리솔이 녹음해 놓은 음성편지를 듣고 감동하여 오랜만에 비행기를 타고 스페인으로 마리솔을 찾으러 간다. 10년의 세월만에 엘렌을 며느리로 받아들인 백작, 파블로는 어느새 엘렌과 사랑에 빠져있었고, 둘은 행복한 미래를 약속하고 백작의 집에는 다시 웃음이 피어난다.

 

전형적인 아이들용 동화이며, 마리솔의 해맑은 미소와 촉촉한 눈매가 영화를 감동의 분위기로 이끌어 간다. 무엇보다 우렁찬 목소리로 노래하는 마리솔은 재능있는 아역배우로서 영화를 이끌어간다. 뻔한 내용이지만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흥미진진하다. 다만 너무 쫓기듯이 빠른 대사가 다소 정신없는 느낌을 주는 영화이다. 많은 대사, 빠른 진행, 영화적 완성도는 뛰어난 편이 아니지만 내용 자체가 가족용이며 흐믓한 결말을 주고 있어서 아이들용 가족영화로는 추천하기 좋은 작품이다. 재능있는 아역배우들의 전성기 시절 영화들을 많이 보면서 정서적 회복을 할 수 있으면 훨씬 좋을 것 같다. 많은 고전영화를 구할 수 있는 시대지만 그럼에도 희귀한 영화들에 대한 갈증이 끊임없이 생기는 것이 현실이다. '길은 멀어도 마음만은'은 노래하는 아역스타 '마리솔'의 연기를 볼 수 있는 귀중한 작품이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무엇이 사람을 기운차게 살게 하는가? 라는 물음을 가졌다. 사람의 성격을 쉽게 고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자신도 뻔히 알고 있으면서 그 비뚤어졌거나 완고하거나 모난 성격 때문에 인생사를 그르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괴로워하며 살고들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 장군 출신의 백작과 사생아처럼 여겨졌다가 비로소 할아버지를 찾게 된 소녀 사이에 벌어지는, 아주 흔한 갈등과 세대차를 무엇이 극복하게 해 주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치는 영화였다. 자신의 명예와 자존감이라는 틀 속에 박혀 살던 백작의 마음을 흔들고 움직인 것은 놀랍게도 사랑이라는 바이러스였다. 물론 비싼 가정교사를 들여 자신의 마음대로 어린 손녀를 가르치고 훈련시켜려고 했지만, 사실 어린 손녀는 너무 영특해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 오히려 그 소녀는 자기 또래의 소작민의 아이들을 불러모아 할아버지에게 들은 이런 저런 군대 이야기를 토대로 병정 놀이를 한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는 할아버지는 자신의 옛 젊은 시절이 떠올라 흥미를 갖는다. 그리고 병정 놀이에 필요한 장난감 등을 한 차 가득 사들고 들어오는 등 손녀의 삶에 조금씩 동화된다. 그런데 손녀의 기특한 대장 놀이에 한 편이 된 아이들이 스스럼 없이 백작의 문지방을 넘어서 들어오면서 아이들의 옷 매무새며 가난에 익숙해진 얼굴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손녀의 배갯머리 충고(?)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백작은 아이들의 부모가 하는 일이며 살아가는 내용을 전해 듣고 월급여를 두 배씩 올려준다. 물론 자기 집 집사며 비서들의 월급도 몇 배로 올려준다. 백작의 마음에 사랑이라는 바이러스가 작용할 때만 가능한 기적이었다. 그리고 자기만을 위한 손녀가 아니라, 손녀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멀리 떨어져 고생하고 있는 어머니와 함께 사는 것임을 알게 된다. 사랑의 바이러스가 충만할 때 세상은 온통 사랑하고 싶은 것들로 가득 채워지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백작은 더 이상 옛날의 자기 중심적인 완고하고 독불장군이 아니다. 그의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 찬 것이다. 그런데 굳이 흠결을 찾자면, 어린 주인공 마리솔의 정신 연령이 너무 자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10살 나이에 걸맞지 않게 너무 성숙한 생각과 노래말은 조금 식상하게 한다. 그 나이를 적절한 순수함과 어린애 다움은 얼마든지 그릴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 관객들의 눈시울을 촉촉하게 적시기에는 충분한 그런 가족 영화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2019년 가을을 붉게 물들이는 11월 1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