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리와 창녀가 제자들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 / 마 21:23-32.
묵상자료 6775호(2019. 12. 4. 수요일).
시편 51:17-19.
찬송 317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잠을 어지럽히는 걱정거리가 있을 때, 억지로라도 몸을 일으켜서 흙과 해가 노는 자리에 끼워봅니다. 따스한 햇살 받으며 아직은 튼튼한 두 다리로 열심히 흙을 밟고 손에 흙을 묻히다 보면요, 꽉 막혀 있던 걱정거리로부터 숨통이 트이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발로 밟고 손으로 만지는 이 흙은, 처음에는 지구였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표면을 덥고 있는 그 바위가 부스러져 생긴 가루였기 때문입니다. 바위가 흙이 되기까지 수천만 년의 세월, 부서지고 부서지고 또 부서지고. 거기에 비하면 내 걱정거리쯤은 먼지처럼 가벼울지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부서졌는데도 흙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시인 문 정희는 흙하고 부르면 심장 저 깊은 곳으로부터 눈물 냄새가 차오르고 이내 두 눈이 젖어온다고 했습니다. <흙>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지요. “흙은 생명의 태반이며 또한 귀의처인 것을 나는 모른다/ 다만 그를 사랑한 도공이 밤낮으로 그를 주물러서/ 달덩이를 낳는 일을 본 일은 있다/ 또한 그의 가슴에 한 줌의 씨앗을 뿌리면/ 철 되어 한 가마의 곡식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도공이 주무르면 달덩이를 낳고, 농부가 씨를 뿌리면 몇 배로 불려서 곡식으로 돌려주는 흙. 또한 흙에서 태어난 것들은 모두 흙으로 다시 돌아가니, 이것이 흙의 기원이자 유한성. 그러니 흙에서 흙으로, 먼지에서 먼지로 라는 말만큼, 한 생애를 심오하고 간략하게 표현한 말은 다시는 없을지도 모르지요. 도연명이 노래했습니다. “인생이란 뿌리 없이 떠도는/ 바람에 흩어지는 길바닥의 먼지/ 이리저리 바람에 뒹구나니/ 이것으로 끝나는 무심한 몸이/ 땅에 떨어지면 모두가 한 형제려니/ 굳이 친척만을 사랑하랴/ 즐거우면 마땅히 노래 부르고/ 술을 빚으면 이웃을 불러라.”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1년 12월 1일 방송>
2. “예수의 권위에 대한 질문(23-27절)”과 “두 아들의 비유(28-32절)”을 읽었습니다. 어느 시대나 권위의 문제는 중요한 것 같습니다. 부모의 권위란 무엇일까? 선생의 권위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은 제게 있어서는 매우 심각하게 다가옵니다. 최근 유투브에서 우리 한국 남자 성인들의 특징으로 부모님 앞에서는 경어(敬語)를 쓸 뿐 아니라, 반드시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린다는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능력이나 약점을 들을 때는 참지만, 부모님을 무시하거나 약점을 말하는 것은 참지 못한다는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권위란 스스로 내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권위를 세워주는 언행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부모나 스승을 높이고 자신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이들을 높여주는 문화가 절실합니다. 오늘은 두 번째 단락 “두 아들의 비유”를 묵상하려고 합니다. 면전에서는 아니요 라고 대답하였지만 돌아서서는 실천에 옮긴 맏아들과 면전에서는 예라고 대답하고 실제로는 실천하지 않은 둘째 아들에 대해서 아버지의 뜻을 따른 이가 누구겠느냐고 주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맏아들이라고 대답합니다. 아주 쉬운 문제이며 대답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런 쉽고도 쉬운 문제를 생각하게 하신 주님은 갑자기 세리와 창녀들에게로 눈을 돌리게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가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쉬운 문제와 쉬운 답을 던지신 주님은 결코 쉽지 않은 말씀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십니다. 누가 보아도 세리와 창녀들은 천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가족과 집과 재산을 다 버리고 신앙의 길에 들어선 제자들보다 그들이 천국에 더 가깝다고 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분명합니다. 언행 불일치의 신앙인들에게, 화려한 미사여구만 늘어놓는 신앙인들에게 주시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행동하는 신앙, 삶으로 증거하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은퇴 후 방송 설교를 자주 시청하게 되었는데, 다양한 설교자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동시대의 역사에 대해서 고민하는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행동을 촉구하는 구체적인 삶을 강조하는 설교는 눈을 비벼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귀만 풍성해지고 사는 것은 당신들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식입니다. 이에 비해서 세리와 창녀는 위선적이거나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지 않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오직 자신의 죄인 됨과 하나님의 은총만을 구할 뿐인 사람들이었으니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