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를 넘어 믿는다는 것은. / 마 22:23-33.
묵상자료 6780호(2019. 12. 9. 월요일).
시편 53:1-3.
찬송 341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통일호라고 하는 완행열차가 있었습니다. 그 전에는 비둘기호라는 더 느린 완행열차도 있었지요. 지난 2004년 4월 1일 KTX가 개통되면서 통일호는 운행을 종료했습니다. 그러면서 통근열차 통학열차라는 말도 사라진 것 같습니다. 통일호 시절에 사람들은 출퇴근 시간대에 운행하는 열차를 통근열차라고 불렀고, 등하교 시간에 운행하는 열차를 통학열차라고 불렀지요. 모두 간이역마다 정차하는 완행열차였습니다. 서민들에게 장거리를 이동하는 수단이 완행열차가 거의 유일했던 시절에, 열차는 늘 북적였고 복잡했습니다. 좌석이네 입석 바닥에 앉은 사람보다 바닥에 앉은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인파를 뚫고 통로를 지나는 일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지요. 사람도 많습니다만, 보따리도 많았습니다. 아들네 가는지 딸네 가는지, 보따리를 발아래 둔 노인의, 장에 팔러 가는지 사왔는지 보자기에 싼 산 닭을 품은 아낙도 있었고, 어디선가는 새우젓 냄새가 나기도 했습니다. 어차하면 아이를 잃어버릴 수도 있어서 어머니들은 보따리 챙기랴 아이 챙기랴 정신 똑바로 차려야 했습니다. 이런 난장판 속에서 그래도 창밖을 보면 은 세상은 참 느긋하게 평화롭게 천천히 흘러갔습니다. 요즘은 많은 것이 편리해졌고 빨라진 세상입니다. 하지만 편리하다고 빠르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사이에 우리가 놓칠 수 있는 것들 혹은 놓친 것도 있겠지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급행열차를 놓친 것이 잘 된 일이라고 노래한 시가 있습니다. “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 된 것이다/ 조그만 간이역에 늙은 역무원/ 바람에 흔들리는 노란 들국화/ 애틋이 숨어 있는 쓸쓸한 아름다움/ 하마터면 나 모를 뻔 했지/ 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 된 일이다/ 서러운 종착역은 어둠에 젖어/ 거기 항시 기다리고 있거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 하듯이/ 서둘음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모를 뻔 했지” 허영자 시인의 <완행열차> 옅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1년 12월 21일 방송>
2. “부활에 대한 토론(23-33절)”을 읽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두개인이라는 종파는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로 유명했습니다. 이른바 수혼법(Levite Law)를 근거로 그런 주장을 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사고로 볼 때 수혼법은 부활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아랍문명권의 전통법이었습니다. 형의 아들을 낳아주기 위해서 여섯 형제들이 형수와 관계를 맺는다는 황당한 전통 말입니다. 부활 역시 사람의 이성에는 도무지 얼토당토 않는 생각입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얘기는 신화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인 때문입니다. 부활 이야기는 창조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이성으로 설명되거나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닌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 교회나 전도자들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설명하려고 기를 쓴다는 현실입니다. 그러니 억지가 난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활은 설명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인데 말입니다.
저는 요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방식에 대해서 많은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잘 이해하고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하는 방식을 택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설명이라는 방식은 그 대상이 지식인일 때 매우 유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식인들처럼 취약한 부류도 드물지 모릅니다. 그들이 가진 지식이란 매우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한 때문입니다. 다행히 제대로 된 지식인들은 이 사실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령 태양계에 존재하는 행성이 알려진 것보다 수천만 배 더 많은 알려지지 않은 행성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벌써 2,700여 년 전의사람 이사야는 이런 진리를 명쾌하게 밝혔습니다. “하늘이 땅 보다 높음같이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보다 높다.”(사 55:6-11)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의 영역은 셈하거나 논리로 맞춰보기보다는 믿는 것이 훨씬 더 빠르고 올바른 방법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처럼 부활은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롭다고 말입니다. 어느 병자에게 “내가 고칠 수 있다고 믿느냐?” 고 물으셨을 때, “예, 제가 믿나이다.” 고 대답했듯 말입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죽음에서 생명을 일으키실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런 믿음을 얻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