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 마 23:13-26.
묵상자료 6783호(2019. 12. 12. 목요일).
시편 54:4-7.
찬송 7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시간이 우리 마음에 드리우는 그림자는 과거. 올 한 해의 대부분을 과거로 보내야 하는 이맘 때 쯤이 되면, 조금은 슬픈 것도 같고 조금은 아픈 것도 같습니다. 정현종 시인은 <견딜 수 없네> 라고 했습니다.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황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그처럼 견딜 수 없는 그림자들, 하지만 그림자가 있다는 말은 빛도 함께 있다는 말. 완전히 어두운 곳에서는 그림자조차 없습니다. 게다가 몇 발자국 물러가 그림자를 바라보면 결코 어둡기만 한 그 무엇이 아닙니다. 1961년 사무엘 베케트는 친구인 알베르토 자코메티에게 <고도를 기다리며> 파리 공연 소도구를 디자인해 달라고 부탁을 했지요. 그런데 어떤 비평가가 자코메티가 디자인한 소도구들이 그다지 무대에 기여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자포메티가 응답했지요. “그림자를 보라.” 그는 우리는, 그림자가 훌륭한 무대장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무대 위의 조명을 받으며 서 있는 물체들에 시선을 뺏겨서, 그림자는 쳐다볼 생각조차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림자는 무대를 꾸미는 또 하나의 소도구이며, 또 그림자가 있기 때문에 깊이가 생깁니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연못의 비친 나무들의 그림자를 통해서 연못의 깊이를 느꼈습니다. 그의 책 [꿈꿀 권리]에서 이렇게 썼지요. “그리하여 또 위의 나무들은 두 개의 차원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나무들의 줄기의 그림자가 연못의 깊이를 더욱 깊게 한다. 물가에서 몽상할 때, 사람들은 반영과 깊이의 변증법을 만들어 내지 않고는 꿈꾸지 못한다. 물 밑으로부터 어떤 물질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올라와 그림자를 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내 발 밑으로 난 그림자를 보면서 견딜 수 없어 하지 말기를요. 빛이 있어 존재했고, 인생이라는 무대를 장식하는 훌륭한 소도구이며, 더욱 더 깊어지게 꿈꾸게 하는 그 무엇이니까요. 하지만 또 그러기 위해서는 그림자만 쳐다보지 말고, 멀리 물러나서 바라보는 과정도 필요합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1년 12월 12일 방송>
2. 어제와 같은 표제어 “위선자들에 대한 책망(13-26절)”을 읽었습니다. 이 짧은 본문에는 무려 4차례나 “화를 입을 것이라”는 저주의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제가 설교자로 일하면서 이 구절을 처음 대하였을 때는 조금은 지나친 말씀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의 일에 부름을 받은 일꾼들인데, 그들이 실수건 무지해서건 잘못한 일을 했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저주를 퍼 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생각이 아주 잘못된 것이라는 걸 깨닫고 있습니다. 루터나 개혁자들이 복음을 율법으로 감추는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에 대해서 심한 저주를 퍼 부은 것도 마땅히 그래야 옳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복음을 덮어버리고, 오히려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율법으로 하나님 앞에 나서도록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엄청난 잘못인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죽음으로 끌어들이는 결과라면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늘 문을 닫아 버리는 사람을 관용할 수 있겠습니까?(13-14절) 겨우 수렁에서 구해 올린 사람을 더 깊은 지옥으로 내던지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15절) 성전을 두고 맹세한 것은 무방하나 성전의 황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 가르치는, 제단을 두고 맹세한 것은 무방하나 제단위의 제물을 두고한 맹세는 꼭 지켜야 한다 가르치는 눈먼 지도자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16-22절). 율법의 형식을 내용보다 더 중하게 가르치는 사람들을 어떻게 관용할 수 있겠습니까?(23-24절). 잔과 접시의 겉만 닦을 뿐 그 안에 찌들어 있는 부패한 음식은 눈먼 사람들을 어떻게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있겠습니까?(25-26절). 주님께서 하신 저주의 말씀들을 반어법으로 꾸며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만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이런 사람들은 길 바닥에 깔린 돌멩이처럼 흔해빠져 있습니다. “하나님 까불지마, 까불면 죽어!!” 이런 막말을 목사의 입에서 나오는 시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관용할 수 있겠습니까?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