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긴 하지만 시련과 고난이 필요한 까닭. / 마 24:1-14.
묵상자료 6785호(2019. 12. 14. 토요일).
시편 55:4-7.
찬송 338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24절기 중 스무 번째 절기인 소설, 보통 이날 첫눈이 내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서울에서 어제 첫 눈 소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감히 말합니다. 기상청에서만 인정하는 첫눈입니다. 새벽에, 아무도 모르게, 이것도 눈인가 싶게 내린 싸락눈이었으니까요. 휴대전화는커녕 집에 전화도 귀했던 시절, 청춘 남녀들은 첫눈을 두고 이런 약속 많이 했다고 하지요. “우리 첫눈 오는 날, 서울 역 시계탑 앞에서 만나자.” 낭만적이지만, 21세기적 사고방식으로는 참 밑도 끝도 없습니다. 도대체 첫눈의 기준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땅에 닿자마자 녹는 눈도 첫눈이라고 해야 하는지. 그리고 몇 시에 만나야 하는지. 일단 첫눈이 내리면 무작정 나가서 계속 기다렸는지. 펑펑 눈이 내리면, 온 세상이 한 장의 흑백 사진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요. 지금은 사라져 버린 두루뭉술한 아날로그적 약속, 아날로그적 감상입니다. 하지만 기상청의 관측과 상관없이, 우리는 이미 서로 통하고 있어요. 첫눈의 기준은 자고로 푸짐하게 펑펑. 그 무너지는 소리에 비명을 지르고 싶을 만큼. “나는 안다/ 깊은 곳일수록 무너지는 곳이/ 무엇인가를 튼튼하게 한다/ 나는 안다/ 찬란한 한 것은 아직 비명의 소리의 화려한 껍데기일 뿐이다/ 처음 보았다/ 그래/ 아스팔트에 몇 백 년 눈이 쌓인다” 김정환 시인의 <첫눈> 중에서 이었습니다. 첫눈이 내리면 이제 본격적으로 얼얼하게 춥고 긴 겨울이 시작되겠지요. 그러니 첫눈 내리기 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곽재구 시인의 <겨울의 춤> 중에서 일부를 소개합니다. “첫 눈이 오기 전에 추억의 창문을 손질해야겠다/ 지난 계절에 쌓인 허무와 슬픔 머지처럼 훌훌 털어내고/ 삐걱 이는 창틀 가장 자리에 기다림의 새 못을 쳐야겠다/ 무의미하게 드리워진 낡은 커튼을 거둬내고/ 영하의 칼바람에도 스러지지 않는 작은 호롱불 하나 밝혀 두어야 하겠다/ 바람에 들판의 갈대들이 서걱 이듯/ 새들의 목소리가 숲속에 흩날리듯/ 낙엽아래 작은 시냇물이 노래하듯/ 차갑고도 빛나는 겨울의 춤을 익혀야 하겠다/ 바라보면 세상은 아름다운 곳”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1년 11월 23일 방송>
2.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1-14절)”을 읽었습니다. 제가 은퇴를 하고 매우 행복하게 살고 있다 생각되는 두 가지는 저렴한 돈으로 명화를 감상할 수 있다는 것과, 서울의 명산인 도봉산 둘레 길을 자주 산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50년대와 60년대의 명화들 가운데는 성경이야기가 아주 많았습니다. 구약 뿐 아니라 신약의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대부분이 여호와(야훼) 하나님 신앙 때문에 고초를 겪는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노예로 끌려가고 성전이 파괴되는 내용들 앞에서는 깊은 슬픔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최근에 감상한 <에스더와 왕>이란 영화에는 바사(페르시아)의 노예로 살고 있던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어떻게 유대인을 몰살시키려는 하만의 음모에서 살아나게 되는지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리스의 알렉산더와 겨루기 위해 출정한 유일한 후원자 아하수에로가 부재중인 위기일발의 시기에 불어 닥친 위기 앞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구원해 주옵소서!” 라는 기도뿐이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고, 이 날이 부림절의 유래가 되었음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노예로 끌려가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불에 타고 무너져 내리는 일이 있다는 것은, 우리들 신앙인들이 깊이 묵상할 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무력함으로 절망하고 하나님을 떠날 명분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천국에서 살 것이라는 미래적 희망은 물론이고, 오히려 현세적 행복에 더 무게 중심을 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질 신앙이란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인데, 그것이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그 까닭은 현실적인 문제가 더 비중이 있다고 생각하는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다름 아닌 시련과 고난이라는 멍에입니다. 앞서 에스더와 왕의 영화가 가르치는 교훈은, 절망의 벽 앞에서 신앙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구원해 주옵소서!”라는 하나님을 향한 전폭적인 신뢰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기도(혹은 아굴)를 배워야 합니다(잠 30:7-9).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