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에 이르는 길. / 요 4:27-42.
묵상자료 6827호(2020. 1. 25. 토요일).
시편 65:4-6.
찬송 446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편지 쓰기를 좋아했던 존 그웬은, 책 읽기도 좋아한 모양입니다. 그녀의 그림에는 책이 있거나 책 읽는 여성이 등장하는 그림이 참 많습니다. 특히 다른 화가들의 그림에서 책 독서중인 사람은, 대부분 의자에 앉아 있거나 소파에 기대어 있지요. 그런데 그웬의 그림에 등장하는 이들은 다릅니다. 책을 손에 든 채, 서서 읽고 있습니다. 내내 그런 자세로 책을 읽었다기 보다는, 책을 읽다가 장소를 막 옮기는 중인 듯합니다. 방밖에서 읽다가 방 안으로 들어 왔거나, 문 쪽 의자에 앉아서 읽다가 창가로 옮기려는 중이 거나요. 실제로 그림 속 검은 드레스를 입은 주인공도 책을 읽다가 창가 의자 쪽으로 막 옮겨 온 듯합니다. 그런데 책에서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어서, 무릎으로 의자를 가늠해서, 이제 곧 앉으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럴 때가 있지요. 책이 매우 재미있고, 몰입이 될 땐, 자리를 옮기거나 식사를 하면서도 책을 보면서 움직입니다. 그러다 어딘가에 부딪히거나 음식을 쏟기도 하지만, 그런 몰입이 주는 기쁨과 희열은 때로 어떤 것에도 비교할 수 없이 크지요. 그림 속 여성은 그런 몰입의 기쁨을 자주 느낄 듯합니다. 뒤쪽으로 보이는 탁자에도 책이 있는 게, 그녀의 독서가 일상이란 걸 말해주는 듯합니다. 또 커튼을 잘 여미기보다는 책으로 눌러놓은 모습이, 독서에 빠진 그녀가 다른 행동에는 무심하거나 급하다는 걸 느끼게 해 줍니다. 그런가하면 독서중인 여성은 앞의 야윈 소녀와 동일 인물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풍성한 검정 드레스와 머리 위 리본장식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책을 읽는 책을 좋아하는 분위기가 그녀의 외적인 결점을 지극히 우아하고 섬세하게 바꾸어 주는 듯도 합니다. 다이어트도 경우에 따라서는 꼭 해야 하고 중요하겠지만, 한 사람이 갖거나 내는 분위기라는 것도 참 중요하지 않을까? 어쩌면 로댕에게서 받은 상처로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그웬도 책들 덕분에 잘 극복해 낸 게 아닐까? 책을 읽듯 두 그림을 비교해 봅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2년 1월 25일 방송>b.
2. 오늘 본문 역시 야곱의 우물 가에서 나누었던 여인과의 대화 후기(後記)입니다. 적어도 4개의 단편적인 말씀들이 한 덩어리로 묶여 있는 내용입니다. 먹을 것을 사러 나갔던 제자들이 돌아와서 주님께서 여인과 얘기하시는 장면을 보고도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 묻지 않았다는 것과, 물동이를 버리고 마을로 들어간 여인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비밀스러운 삶을 꿰뚫고 계신 주님을 알리며 메시야 인지 모르겠다고 전한 일, 그리고 제자들이 먹을 것을 권하자 거절하시면서 당신에게는 누구도 모르는 양식이 있다 하신 것,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이 사람들을 향해서 메시야인 것을 고백한 내용이 그것들입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많은 사람들을 예수 믿게 하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믿음에 이르는 길, 이 보다 더 힘들고 귀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한 남자나 여자를 믿는 일, 한 친구를 믿는 일, 그리고 한 스승을 믿는 일은 결코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닌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을 믿음 가운데 이르게 할 뿐 아니라, 다른 많은 이웃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깊은 인상을 받게 합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과의 짧은 만남에서 그녀의 삶에 파고들어오는 감동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가장 부끄러운 면모를 끌어내면서도, 그런 그녀의 갈망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헛된 것이었는지를 깨우쳐 주셨고, 또 다른 그녀의 갈망을, 곧 참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예배의 감격 속에 들어가고 싶은, 분명하게 보여주신 때문입니다. 이런 바탕에는 예수님의 인격적인 만져주심이 그녀를 흔들어놓았을 것입니다. 이 본문의 마지막에 인용된 사람들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녀의 말을 믿었다는 것과,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주님을 뵙고는 구세주이심을 알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다른 이웃들과 상종을 할 수 없었던 여인이, 어떻게 말했기에 호소력이 있었고,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신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믿음에 이르는 길은 성령의 역사였음이 분명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