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가까운 가족이니까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 요 7:1-9.

박성완 2020. 2. 7. 00:40

묵상자료 6840(2020. 2. 7. 금요일).

시편 68:1-3.

찬송 9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노스탤지어는 꼭 눈으로만 찾아오지 않습니다. 프루스트의 마들렌처럼, 맛이기도 하고 때론 냄새이기도 합니다. 그 맛이 그립고 그 냄새가 그리울 때의 감정은 무엇이라 말로 표현하기 힘들며, 밀란 쿤데라의 표현처럼, 돌아가고자 하는 채워지지 않는 욕구 때문에 절절해 지는데요. 그래서 이런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작가가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내가 겪었던 일을 말하겠습니다. 나는 이 향수를 아주 가끔만 맡습니다. 그럴 때면 이 향기는 내 기억 속으로 침투해서 나를 즉시 다른 공간으로 옮겨줍니다. 내가 그녀만을 위해 아껴두었던 숨겨진 세계로 말이지요. 이 냄새를 한 번만 강하게 들이마셔도, 한 방울만 떨어트려도 내 인생 최초의 냄새인 어머니의 젖 냄새를 다시 만나는 기분을 느낀답니다. 하지만 향수를 몸에 뿌리면 그건 여러 뉘앙스로 이동하고 퍼지며, 음악소리처럼 점점 물질화되어 하모니를 만들어 냅니다. 그 향기의 언어가 나의 과거를 현재로 만들지요.” 사라 에밀리 미아노의 [눈에 대한 백과사전]에 나오는 아름다운 상상입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렸을 적 엄마 냄새, 집 냄새, 고향 냄새가 향수로 만들어져서, 그리울 때 맡을 수만 있다면.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데이지의 인생]에서 주인공은 어렸을 때 엄마를 교통사고로 잃었습니다. 주인공은 엄마 냄새를 오랫동안 그리워했는데, 그 냄새의 정체가 엄마가 쓰던 향수라는 걸 알게 됩니다. “오래도록 같은 향수를 찾았지만, 결국은 찾지 못했다. 최근에 새로 생긴 가게에 우연히 들렸다가 어디선가 본 듯한 병인 듯싶어 집어보니, 그 향내가 났다. 가게 직원이 이 향수를 제조하는 브랜드가 최근에 일본에 들어왔어요. 프랑스에서는 옛날부터 유명한 향수예요. 하면서, 내 팔 안쪽에 칙 뿌려주었다. 나는 20년 만에 맡는 엄마 냄새에, 그 자리에서 그만 울고 말았다. 그리고 사정을 알게 된 점원의 위로를 받으면서 그 향수를 사들고 돌아왔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4130일 방송>

 

2. “믿지 않는 예수의 형제들(1-9)”을 읽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지키는 3대 명절은 유월절(정월 보름), 오순절(유월절 후 50), 초막절(칠월 보름), 유대인 성인 남자는 반드시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은 모든 남자가 생후 8일째 되는 날 할례를 받고 명명(命名)을 하게 되고, 성인 남자는 성전세 반세겔과 3대 명절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지키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형제들이 유다지방으로 가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들어내 보이라는 권유를 하고 있는데, 비아냥거리는 말로 들립니다. 형제들조차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구절이 그런 암시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서 올라가서 명절을 지키라. 아직 나의 때가 되지 않았으니 나는 이번 명절에는 올라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형제들을 포함해서 주위의 차가운 분위기에 예수님의 섭섭한 속내를 엿볼 수 있는 구절입니다.

   오늘 묵상할 말씀은 표제어에서 말하듯, 예수의 형제들이 무엇을 믿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의 실체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선 6장에서 유대인들과 토론의 중심주제인 생명의 빵으로 자신을 지칭한 말씀에 대해서, 예수님의 형제들조차 그게 무슨 말인지 믿지 못했다는 말인지, 아니면 그동안 예수님의 전반적인 행적에 대해서 곱지 않은 시선에서 전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인지를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보여주었던 불신적인 자세는 어떤 특정 주제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포괄적인 차원에서 불신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는 적어도 30여 년 동안 한 집안에서 생활해 온 가족의 일원이었는데, 불과 몇 달 사이에 유명인이 되어 등장했을 때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낯섦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런 현상을 두고 선지자가 자기 집과 고향 외에서는 존경을 받는다는 속담이 생겼는지 모릅니다(6:4).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는 또 다른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가족 간에는 매일 생활 속에서 부대끼며 사는 때문에 객관적인 평가가 어려운 때문이 그랬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가족이라는 관계가 주는 한계일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