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신성모독죄를 뒤집어 쓴 예수님. / 요 10:31-42.

박성완 2020. 2. 21. 00:34

묵상자료 6854(2020. 2. 21. 금요일).

시편 69:1-2.

찬송 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말했다. “절대 침체되지 마세요. 삶은 무엇인가가 되어가는 영속적인 과정입니다. 모든 단계의 끝은, 다른 단계의 시작으로 이어집니다.” 자신의 묘비명에 마저도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고 독설을 내놓았던 조지 버나드 쇼우의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이처럼 따뜻한 격려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쇼우로부터 이 구절이 적힌 편지를 받은 이는, 19세기 영국 최고의 명배우 엘리스 엘렌 테리였습니다. 테리는 쇼우보다 여덟살이 많았고,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테리는 탁월한 연기력을 인정받아 이미 유명인사의 반열에 올라있었지만,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으로 청운의 꿈을 안고 런던에 왔던 쇼우는, 원고를 쓸 장소도 마땅치 않아서, 대영 박물관의 도서실에 앉아서 책을 읽고 소설을 썼습니다. 소설을 발표하려고 해도 출판사에게 거절당하기 일쑤였고, 어쩌다 잡지에 게재된 소설도 이렇다 할 반응은 없었습니다. 버나드 쇼우의 20대는 좌절과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소설이 대중으로부터 인기를 얻지 못하자, 쇼우는 30대 중반에 방향을 전환합니다. 바로 희곡이었습니다. 그의 희곡이 잇따라 무대에 올랐고, 비평가들로부터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쇼우가 테리에게 이 편지를 썼던 건 그 즈음이었습니다. 그녀는 쉰 살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웠던 여자라도, 또 탁월한 연기력을 발휘하는 배우라도 오십이라는 나이는 앞날에 대해 많은 것을 고민하게 만들었을 겁니다. 버나드 쇼우의 경우 소설에만 매달렸을 때는 소설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그것이 끝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계획에 없었던 희곡으로 방향을 전환했을 때, 대단한 성공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대중의 인기를 몰아 준 <피그말리온>,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성녀 조엔>도 희곡이었지요. 지난 많은 시간과 노력을 바쳐온 이것을 끝내면, 모든 것이 끝날 것처럼 두려워집니다. 그러나 쇼우는 말합니다. “절대 침체되지 마세요. 삶은 무엇인가가 되어가는 영속적인 과정입니다. 모든 단계의 끝은 다른 단계의 시작으로 이어집니다.” 테리의 경우엔 어땠을까요? 배우로써의 모든 단계를 끝내고 은퇴한 후에, 그녀는 셰익스피어에 대한 강연으로 또 다른 명성을 쌓았습니다. 끝이 보인다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이 사랑이든 일이든. 지금까지 충분히 노력했다면, 헛되지 않습니다. 그 노력과 경험이 다른 단계의 시작을 만드는데 무엇보다 큰 힘과 지혜를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은 그렇게 무엇인가가 되어가는 영속적인 과정입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4318일 방송>

 

2. 어제에 이어서 유다인에게 배척을 받으신 예수(31-42)”을 읽었습니다. 유다인들이 돌을 들어 예수를 치려고 하자, 당신이 좋은 일을 했는데, 어떤 것이 못마땅해서 돌로 치려느냐고 묻자, 그들은 하나님을 모독한 것 때문이며, 사람으로써 하나님 행세를 하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서 율법서를 인용하면서, 하나님께서 너희를 신이라 불렀다는 기록을 언급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은 모두 신이라고 불렀다고 하지 않았느냐면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거룩한 일을 맡기셨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말 때문에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하니,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으니, 나를 믿어야 옳지 않느냐고 차분히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려 했고, 예수님은 그들을 피해서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서 거기 머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자신을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신성 모독죄를 자주 강조하곤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다니는 사람은 참을 수 없는 신성모독 죄에 해당했을 것이고, 돌을 들어 쳐서 죽이고 싶을 만큼 화가 났을 것입니다. 만일 제가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았던 유다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면, 저 역시도 유다인들처럼 신성모독죄 운운하며 돌을 들었을게 분명합니다. 사실 유대교만이 아니라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는 신성모독죄는 화형이나 단두대에 올려 참수하는 최악의 단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신성모독죄에서 자유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었습니다. 그분 자신이 하나님이신 때문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