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법정에 고소하지 말라. 하나님이 갚으신다. / 고전 5:9-6:11.
묵상자료 6873호(2020. 3. 11. 수요일).
시편 71:9-11.
찬송 517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말했다. “담장을 거두어라. 그러면 자연이 내 집 정원으로 찾아올 것이다.” 담장을 세웠던 이유가, 처음에는 일종의 영역 표시였을 겁니다. 여기부터는 당신이 마구 다녀도 되는 곳이 아니라, 우리 집이니 넘어오지 마시오. 이런 일종의 경계선 같은 의미로 말이지요. 하지만 나뭇가지로 엮어 세운 울타리 정도였던 담장은,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견고해지고 높아졌습니다. 사람들은 담장이 가족과 재산을 보호해 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가진 것이 많을수록 혹은 겁이 많을수록, 마치 자물쇠를 채우듯 담장을 점점 더 단단하게 점점 더 높이 세웠습니다. 아무리 좋은 곳에 집을 지었어도, 높은 담장 안에 있으면 뭐가 보일까요? 아마 답답한 담벼락밖에 보이지 않을 겁니다. 18세기 영국에서 저택의 담장을 스스로 무너트리게 한 사람이 있습니다. 화가이자 건축가였던 윌리엄 캔트였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풍경화 속 전원처럼 펼쳐지는 자유롭고 낭만적인 전원을 갖길 소망했지만, 마을만한 크기가 아니고서야 담장 안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윌리엄 캔트는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도 꿈꾸는 정원을 가질 수 있는 획기적인 발상을 내 놓았지요. “담장을 거두어라. 그러면 자연이 내 집 정원으로 찾아올 것이다.” 바로 영국식 정원의 시작이었습니다. 영국식 정원의 특징은 개인의 정원이라도 너른 초원을 연상시키는데요. 그 비결은 담장을 없애서 넓은 시야를 확보하는데 있었습니다. 가끔 이런 식으로 신세 한탄을 할 때가 있지요. 나를 인정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도 없고, 되는 일도 없다. 지지리 운도 없는 것 같다. 내 인생 참 답답하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사람도 정말로 그렇기만 한 사람은 없습니다. 혹시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상처받는 일이 두렵고 불안해서, 스스로를 지키려고 또 자기를 보호하려고 세운 담장이 너무 높고 단단해선 아닐까요? 자아라는 담장이 높고 단단하면 안전할진 몰라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현기증만 일으키게 할 뿐이며, 어떻게 그 담장을 넘어야 할 지 몰라서 아무도 찾아갈 수 없습니다. 사랑도 그리고 심지어 사소한 행운조차도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4년 4월 3일 방송>
2. “음행에 대한 바울의 단죄(9-13절”과 “교우끼리 송사하지 말라(6:1-13)”을 읽었습니다. 어제 말씀의 연속에서 사도는 비록 음행이나 탐욕 그리고 약탈과 우상숭배를 일삼는 이방인과 교제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라고 부기(付記)를 달고 있습니다. 이유는 그렇게 한다면, 이 세상 안에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차제에 최근에 큰 이슈로 부각되고 있는 이슬람교나 타종교에 대해서 극심한 대립각을 세우는 보수 기독교에 대해서도 오늘의 말씀이 일조할 수 있다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타 종교인과 원수처럼 싸우듯 살아갈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들도 좋은 이웃으로 교제해야 옳다는 뜻입니다. 그들 역시 잠정적인 하나님의 백성인 때문이고, 그들이 없는 곳을 찾는다면 세상을 떠나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 단락에 대해서 묵상하려고 합니다. 요즘 교회 안에서 세상 법정에 기대는 송사(訟事)가 유독 많아졌습니다. 오래 전 무슨 모피사건으로 교회 사모와 권사 등 교우들이 청문회에 불려나가 신문을 받는 장면을 TV로 시청한 적이 있습니다. “사모님이 받으셨잖아요?” “권사님 무슨 말씀을?” 이런 장면이 세상에 공개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 역시 세상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윤리와 도덕이라는 잣대로 흠결이 없는 사람이란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충분히 시빗거리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를 세상 법정에 고소하게 되면 세상 사람들 앞에서 비난거리가 되고 마침내는 기독교회의 순기능이나 전도의 문도 닫힐 것입니다. 김영삼 정부에서 청와대 비서실장을 역임했던 김광일 장로님은 제게 이런 부탁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제발 교회 문제로 세상 법정에 고소하지 마세요.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사도는 그냥 억울한 일이나 사기 등을 당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사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앉을 자리가 없다는 점을 확신한다면 말입니다. 제가 교육관을 지을 때 어느 장로님에게 큰 손해를 봤는데, 사기친 200만원을 끝내 받지 못했습니다. 90년대 초반의 저의 두 달 치 월급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손해 본 138평짜리 교육관을 850평짜리 교회당으로 바꿔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반전이십니다.
3. 안부도 묻기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