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순명이든 거역이든 책임을 져야 합니다. / 고전 7:10-24.

박성완 2020. 3. 14. 00:39

묵상자료 6876(2020. 3. 14. 토요일).

시편 71:17-18.

찬송 33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말했다. “고통 자체는 서로 같은 것일 수 없어서, 사람을 저마다 외로운 인간으로 갈라놓지만, 그 괴로워하는 모습은 사람을 접근시키기 마련이다.”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또 정치인이기도 했던 앙드레 말로가 소설 [인간의 조건]에 썼던 구절입니다. 고통과 외로움은 붙어 다니는 짝꿍인가 봅니다. 비슷한 말을 미셀 우엘벡이 소설 [소립자]에서도 했습니다. “인간이 혼자임을 절감하는 순간은 고통을 느낄 때다.” 우린 각각 몸의 결 마음의 결이 서로 다르게 만들어 졌기 때문에, 남의 고통을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온전히 다 이해할 수 없더라도, 남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에 슬픔의 물결이 출렁입니다. 가까이 다가가 위로해 주고 싶고 무엇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측은지심이지요.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감정이지만, 세상엔 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성배의 기사 파르치팔이 어리석었던 시절에 그랬습니다. 어느 날 파르치팔이 어부 왕 안포푸타스의 화려한 만찬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곳은 성배의 성으로 지상의 온갖 맛있는 음식이 성배에서 나왔고 100여명에게 나누어 주었는데도 줄어들거나 바닥을 보이지 않았지요. 그런 기적을 베푸는 성배를 갖고 있었는데도, 안푸프타스는 고통스럽고 끔찍해 보였습니다. 만찬이 끝날 무렵, 시종이 파르치팔에게 왕이 내리는 선물이라면서 아름다운 칼을 바칩니다. 이쯤 되면 물어야 하지요. 이 이상한 기적의 정체는 무엇이냐고, 왕은 어디가 아프냐고? 이 칼은 왜 나에게 주는 거냐고? 하지만 파르치팔은 아무 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아직 어리석었던 시절이라,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말라는 스승의 가르침만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날이 밝아 결국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성을 떠나는데, 시종이 파르치팔에게 햇빛을 받을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고 욕을 퍼붓습니다. 성배의 성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안포푸타스왕이 파르치팔을 초대한 건,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왕의 저주는 질문을 통해서만 풀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파르치팔은 그 고통에 대해서 아무 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성배의 성은 다시 굳게 문이 닫혔고, 파르치팔이 쉽게 구원할 수 있었을 안포트타스 왕은 끝없는 고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처럼 고통이라는 고통을 겪는 당사자가 먼저 말하기 힘든 것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그 가슴 속 깊은 곳에서는 누군가 먼저 다가와 물어주길 바라는 마음을 눈물겹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측은지심을 느낀다면, 모른 척 지나치지 말고 무슨 일이냐고 조심스럽게 진심을 다해 묻고 그 가혹한 경험에 대해서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성배의 기적은 그렇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질문을 받은 사람도 질문을 한 사람도,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삶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면서.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4428일 방송>

 

2. “결혼 문제(10-16)”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처지대로(17-24)”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결혼의 문제는 제3자가 개입하는 게 도움이 될지 아니면 해()가 될지 모를 일입니다. 부모도 친구도 혹은 상담자 역시 결혼 당사자들에 비해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가장 오랜 시간 열심히 생각하고 따져보아야 할 사람은 당사자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당사자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더 합당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두 번째 단락은 자칫 운명론을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 역시도 이런 운명론과 하나님의 섭리를 제대로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두 주제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누구도 운명과 하나님의 섭리를 대항할 수도 거스릴 수도 없다는 점입니다.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 호기롭게 운명을 상대로 싸워 이긴 사람들 얘기가 많습니다. 이솝 우화에 운명의 신 티케가 나옵니다. 한 젊은이가 먼 길을 걸어오느라 목도 마르고 피곤했습니다. 우물을 만나자 정신없이 물을 퍼마시고 우물가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때 티케가 그 젊은이를 깨웠습니다. 이렇게 자다간 우물에 빠져죽을 수도 있고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을 수도 있다면서 말입니다. 젊은이가 귀찮게 굴지 말라고 거절했지만, 티케는 멈추지 않고 깨웁니다. 그러면서 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러다 우물에 빠지거나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으면, 운이 나쁘고 재수가 없었다며 나를 원망할게 아니요?” 라고 했다 합니다. 그런가 하면 오이디푸스의 얘기는 운명을 피해 달아나지만, 결국은 운명에 따라 불행한 주인공이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여자나 노예, 가난뱅이나 어리석은 사람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원망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태어난 그대로가 훨씬 더 축복일지 모릅니다. 천국문 앞에 있는 나무에는 사람들의 저마다의 삶의 얘기가 적힌 글이 있는데, 너무도 힘든 일생들이어서 자신의 삶과 바꾸고 싶어하지 않는다니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