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이해를 폭 넓게 가진다면. / 고전 7:25-31.
묵상자료 6878호(2020. 3. 16. 월요일).
시편 71:22-24.
찬송 174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봄이면 수시로 비가 내립니다. 자라나는 풀과 나무에 꼭 필요한 비일 텐데, 그래서 어떤 날은 덕분에 세상이 생기 있어 지는 듯하지만, 어떤 날은 춥고 스산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젖은 우산이며 젖은 길들이 성가시고 불편하게도 느껴집니다. 특히 그 길이 흙길이기라도 하면 불편함과 곤란함은 몇 배 더 커집니다. 하지만 그림 속에서 엿보는 비오는 날의 흙길은, 오히려 신선하고 새롭습니다. 화가 장 베로는 1849년 러시아 상트 페테스브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는 프랑스인이었지만 조각가였던 아버지가 러시아로부터 작품을 의뢰 받는 바람에, 러시아에서 태어나고 자라게 된 거지요. 하지만 아버지는 장 베로가 불과 4살 때 세상을 떠납니다. 그 후 장 베로는 프랑스로 돌아와 법학을 공부합니다. 보불 전쟁을 겪고 난 후, 장 베로는 심경의 변화를 겪게 됩니다. 전쟁을 겪고 보니 목숨이란 꼭 하고 싶은 걸 하기에도 짧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걸까요? 그는 법률가의 길을 포기하고, 그림을 배우고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에게도 당시 최대 화풍이었던 인상주의의 영향이 빗겨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이 시골의 햇빛과 풍경을 찾아가는 동안, 오히려 파리의 도심이나 번화가로 더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거리나 번화가에 깃든 일상의 모습들을 그렸습니다. 그런 그의 그림은 귀족 계급과 부유층에서 특히 좋아했다고 하는데요. 장 베로는 그들을 풍자하는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장 베로의 그림에 보이는 19세기 파리의 도심 거리는, 아직 흙길입니다. 그림 <카푸신 거리>에서도 그렇고, <샹젤리제 거리의 모자 파는 여성> 에서도 그렇고, 비가 오니 마차가 지나다니는 도심의 흙길이 패이거나 막히니, 청소부가 나와 흙길을 다시 다지거나 물을 쓸어내기도 합니다. 길고 풍성한 드레스를 입은 여성들은 치마가 젖을 새라, 드레스를 치켜들고 길을 건넙니다. 그렇게 드레스를 치켜든 상젤리제 거리의 모자 파는 여성의 모습이며, 들고 있는 둥근 모자 통이 참 특이하게 여겨집니다. 그야말로 자신이 팔려고 든 모자통 안의 모자들을 다 사고도 남을 만큼 부유하고 화려해 보여섭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2년 3월 16일 방송>a.
2. “종말을 목전에 둔 미혼 남녀들(25-31절)”을 읽었습니다. 요즘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기독교회에 대해서 걱정하는 분들이 많이 생긴 것 같습니다. 대부분이 부정적인 시각이어서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령 오늘 표제어가 종말을 목전에 둔 미혼 남녀들에게 사도는 혼인을 하지 말고,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어떠냐고 아주 강한 어조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도 결혼생활을 부정적으로 가르치는 분들도 없지 않은 데 말입니다. 심지어 결혼한 이들에게는 아내가 없는 듯, 남편이 없는 듯 살아가라고 권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권고의 바탕에는 종말이라는 단어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는 사도가 언급하는 종말은 우주적인 파국을 의미한다는 데 주의해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사도가 고린도 전서를 기록한 지가 2,00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우주적인 파국인 종말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고작 100년 밖에 살지 못하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해당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종말은 개인적인 종말로 우리 개개인이 맞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저는 사도 바울의 신앙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임박한 종말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학교에서는 세 가지 종말관을 가르칩니다. 곧 주님께서 재림하신다는 임박한 종말관, 그리고 누구도 알 수 없는 종말의 날인 미래적 종말관, 마지막으로는 이미 성도들의 마음속에 이루어졌다는 실현된 종말관이 그것입니다. 학자들은 마태와 마가는 임박한 종말관을, 누가는 미래적 종말관을, 요한은 실현된 종말관을 주장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매우 흥미 있는 관찰입니다. 저는 이 세 가지 종말이해를 우리가 가지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주님이 내 안에 계심으로 실현된 종말 속에 살고 있으며, 죽음이 머잖으니 임박한 종말관을, 그리고 재림하실 주님은 미래적 종말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독신 권고보다는 하나님의 혼인에 대한 명령을 따르는 게 맞는다고 저는 믿습니다. 물론 결혼생활이 꿈꾸는 것 보다는 힘든 면이 많은 것은, 사랑의 양면성을 모두 사랑하도록 훈련받지 못한 때문이지만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