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 고후 2:14-3:6.
묵상자료 6894호(2020. 4. 1. 수요일).
시편 74:1-2.
찬송 428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서양 사람들에게 문신은,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좀 더 흔하고 긍정적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가끔은 어깨와 팔에 힘을 뜻하는 한자 력(力)자나 사랑 같은 한글 단어를 새긴 서양인들도 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새기기는 했어도, 정작 그 한자나 한글의 뜻은 모르기도 합니다. 별로 알려고도 하지 않지요. 우리가 티셔츠에 새겨진 영어 문장들의 뜻을 모르거나 상관하지 않은 채 입는 것과 비슷하달 까요? 그들에게 그냥 글자의 생김새 자체가 갖는 신비롭거나 특이하고 강력한 느낌이 더 중요할 겁니다. 그래도 한 한국 학생이 어느 날 여행길에서 만난 미국인 동행자의 팔에 새겨진 복 자를 보고 말을 건넸습니다. “그 글자는 행운을 뜻해요. 좋은 일을 불러들이는 힘이 있으니,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 그러자 미국인 친구는 정말 그런 뜻이냐고, 몇 번이나 되물으면서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몸에 새겼으면서도 그 좋은 뜻을 모르고 지냈던 사람이 있었는가하면, 어떤 남학생은 서류에 새겨진 한글을 한자로 잘못 해석해, 한동안 인생 전체를 포기할 듯 방황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중학교까지 미국에서 다니다, 한국에 온 학생이었지요. 돌아와서 한자도 처음 공부하게 됐는데, 너무나 어려웠지만 한편으로는 한자에 의해 그 뜻을 새롭게 알게 된 단어들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처음 독일어를 배우면 영어의 모든 단어를 독일어식으로 읽게 되듯이, 한글의 많은 부분도 무조건 한자어나 그 뜻으로 해석하게 되는 일도 많았지요.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집에 있는 서류를 보게 됐습니다. 주민등록 등본 같은 호적관련 서류였지요. 그런데 그 서류에 자기의 이름 옆으로 아버지와의 관계를 적는 란에, 누구누구의 자(子)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글로 적힌 “의 자”, 누구의 아들이라는 의 자를, 굳이 의붓아들이라는 의자(椅子) 어려운 한자 단어로 이해한 것이었습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2년 4월 2일 방송>a.
2. “그리스도의 향기(2:14-17)”과 “새 계약의 일꾼(3:1-6)”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우리 기독교 역시 상징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언어 생활에서 뿐 아니라, 시각과 후각 등 감각적인 상징들도 많이 사용합니다. 오느라 본문에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향기와 비슷하면서도 의미는 많이 다른 낱말이 냄새입니다. 향기는 꽃이나 향수 등에서 풍기는 상쾌하고 싱그러운 것입니다. 이에 반해서 냄새는 고기 굽는 냄새처럼 긍정적인 것도 있지만, 오물 냄새 땀 냄새 등 코를 역하게 자극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합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처럼 향기는 좋은 것이고 냄새는 나쁜 것이다 라고 구별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우리 크리스천을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정의하는 사도의 심정을 생각하며 의미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사도는 주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한 분이었으니까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났을 것입니다. 진리를 갈망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하는데 전환점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현재의 삶에 뭔가 도움이 될까 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까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사도가 가장 오랜 시간동안 목회한 곳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로마의 위성도시일 뿐 아니라 로마의 용병으로 참가했던 사람들이 제대를 하고 마지막 삶의 터전으로 생각한 곳이었기에, 결코 촌스럽지도 무지하지도 않은 중산층 정도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리 분별력도 있고, 자기 주장도 확실하게 하고, 비판정신도 가능했다고 보여집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라고 사도는 썼습니다. 이는 자부심과 함께 일종의 책임감까지 느끼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언젠가부터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신앙의 의미와 목적이 크게 빗나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번 코로나 19 사태에 대응하는 일환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정부가 요구하고 있습니다. 잠재적 보균자가 누군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학교는 물론 교회도 당연히 협력해야 하는데, 교회가 어떤 경우에도 예배를 드려야 한다며, 여전히 15% 정도의 교회들이 위험한 예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순교자적 자세로 예배를 드린다고도 합니다. 세상을 구원할 거룩한 의무를 가진 교회가 세상을 죽음으로 몰고갈 마귀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 운동은 최소한의 상식입니다. 이를 이해할 수 없는 교회 지도자들이 누구인지 이번 기회에 세상에 똑똑히 알리는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까?
3. 한 달간의 쓰레기장 당번을 마치고 건강하게 어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