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 / 고후 4:13-18.
묵상자료 6897호(2020. 4. 4. 토요일).
시편 74:9-11.
찬송 344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19세기 중엽 서양에서는 동양에 대한 관심이 엄청나게 높았습니다. 자연 화가들도 동양을 여행하고 그곳을 화폭에 담는 일이 많아졌지요. 그런 화가들을 묶어 흔히 오리엔탈리스트라고 부르는데, 미국 화가인 에드윈 로드윅스는 그 중에서도 특히 대표적인 오리엔탈리스트였습니다. 인도 전문화가라고 불릴 정도였지요. 19세기 인도의 풍경과 일상이 어떠했는지를, 그의 그림을 통해 짐작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사하란 풀 위의 인도 이발사>도 그런 그림중 하나입니다. 누런 흙먼지가 가득한 흙길 한 편으로, 머리에 터번을 두른 몇 명의 이발사가 땅 바닥에 줄지어 앉아 있습니다. 이발사들 앞으로는 손님들이 머리 손질을 맡긴 채, 역시 줄지어 앉아 있지요. 그래도 손님은 손님이니 흙바닥에 그냥 앉지 않도록, 붉은 천을 깔아주긴 했습니다. 손님들은 신발을 벗고 천위에 앉아 머리를 내민 중입니다. 그런데 맨 앞쪽의 어린 손님은 머리를 깎는 이발사의 손길이 아픈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습니다. 나머지 두 손님도 옆머리만이 남아 있는 노인들인데 표정들이 썩 좋지는 많은 않습니다. 거리 이발사들의 머리 깎는 솜씨가 별로여선지, 아니면 거리 이발사들에게 머리를 깎아야 하는 삶이 고달파선지. 아마 양쪽 다 겠지요. 그래도 한편으론 머리가 계속 자라는 것이어서, 이번엔 마음에 들지 않았어도, 다음에 다시 마음에 들게 자를 수 있고, 또 거리의 이발사들에게도 계속 일이 있을 거라는 게 새삼 다행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노래의 날개위에, 2012년 4월 4일 방송>b.
2. “질그릇에 담긴 보물(13-15절)”과 “믿음의 생활(16-18절)”을 읽었습니다. 첫 단락은 어제 말씀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시편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데, “내가 믿는고로 말하리라(시 116:10)”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말할 수 있고, 믿음으로 말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4세기의 교부 어거스틴이 했던 유명한 말, “믿기 위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겠다 싶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고, 믿음의 귀로 들을 때만이 모든 일들이 이해되는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세상을 섭리하고 계신다는 말씀을 믿을 때, 세상이 제대로 보이고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도가 하나님께서 주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듯 우리도 다시 살리실 것을 믿을 때 이 기쁜 소식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단락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사랑하는 구절이 들어 있습니다. 개역 성경 구절로 잘 외우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16절) 겉과 속,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자칫 영지적 이원론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이분법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영지주의자들은 겉과 속을 서로 다른 것으로 분리해서 이해하는 것에 반해서, 사도는 이 둘을 양면의 동전처럼 아니면 손등과 손바닥처럼 이 둘을 온전한 하나로 보는 개념입니다. 마치 사랑과 미움이 서로 다른 개념이 아니라, 한 사랑의 두 속성으로 곧 온전한 사랑으로 이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분명 우리는 겉 사람이 있습니다. 약하고 시들고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찬 눈에 보이는 우리의 질그릇 같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우리의 모습이 있는데 바로 믿음으로 무장한 속 사람입니다. 주 예수를 온전히 의지하는 담대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 옛날 모세나 다윗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모두 겉으론 약점과 허물과 나약한 인간이었으나, 속 사람은 대단한 믿음의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때론 넘어지면서도 다시 일어나는 믿음이 먼저였는데, 그 믿음이란 자신의 의지나 신념을 따른 믿음이 아니라, 성령께 인도를 받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