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죽은 자를 위한 세례는 부활신앙 때문. / 고전 15:29-41.

박성완 2020. 4. 15. 00:40

묵상자료 6908(2020. 4. 15 수요일).

시편 76:10-12.

찬송 24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생각 하나 이어갑니다. <아기 돼지 삼형제>라는 영국의 동화를 보면, 아기 돼지 삼형제가 엄마 품을 떠나서 각자 집을 짓지 않아요? 첫째 돼지는 집짓기가 귀찮아서 지푸라기로 얼기설기 초가집을 짓고, 둘째 돼지는 빨리 집을 짓고 놀고 싶어서 나무로 대충 짓습니다. 하지만 셋째 돼지는 오랫동안 공들여서 벽돌로 아주 튼튼하게 짓지요. 그 이후에 이 셋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지는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실 테니까 생략하고요. 여기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지푸라기나 나무로 지은 집이 정말 늑대 입김에 날아갈 만큼 약한가 하는 건데요. 옛날 우리 조상들이 집과 그릇을 만드는 주재료가 다름 아닌 지푸라기와 나무 또 흙이었기 때문입니다. 언덕에 가서 파온 맑은 흙을 큰 그릇에 담고, 물을 부은 다음 장대로 휘휘 젓습니다. 이렇게 흙을 물에 푼 다음에는 물을 따라 버리고 하루를 재우는데요. 이튿날이 되면 흙은 앙금이 돼서 가라앉고 맑은 물이 떠오릅니다. 다시 이 물을 버리고 남은 흙을 만지면 밀가루처럼 아주 곱다고 하는데, 이 과정을 통틀어서 맥질이라고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맥질로 만들어진 흙으로 집도 짓고 도자기도 구웠습니다. 흙에서 한 평생을 살았고, 수백 년 전 도자기가 박물관에 있지요. 다시 말해 지푸라기나 나무로 지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얼기설기 짓고 대충지은 방법이 문제였던 겁니다. 무엇이든 맥질처럼 시간과 정성을 들여 만들면, 튼튼할 뿐 아니라 내 것이라는 애착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집이든 사람이든 일이든 말이지요. 만약에 세상에 마음 붙일 곳 하나 없는 것 같이 느껴진다면, 맥질이 부족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해봅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8430일 방송>

 

2. “죽은 자를 위한 세례(29-34)”육체의 부활(35-41)”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 단락입니다. 죽은 자를 위해서 살아 있는 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아무 것도 없다고 할 수도 있고, 기도는 해 줄 수 있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실제로 목회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추모회를 인도할 때입니다. 추모의 대상이 주인공인 자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개신교회 목회 지침서나 지도자들은 추모의 대상보다는 살아 있는 가족들을 위한 권면의 말로 채우곤 합니다. 저도 그래왔습니다. 이미 흙이 되신 부모님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포기한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매우 낯선 얘기가 등장합니다. 죽은이들을 위해서 세례를 받는 일이 이미 1세기 초대교회 안에서 성행하고 있었다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런 죽은 자들을 위한 세례를 주는 가장 큰 이유로 부활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을 대신해서 세례를 받습니까?”(29). 그 세례가 효력을 가지는지 여부는 다음 일이고,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활하게 될 때 세례를 받지 못한 가족들이 겪게 될 난처함을 염려한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제가 직접 경험한 것은, 제가 부산에서 목회할 때 손자 손녀를 데리고 교회에 오시던 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36개월만에 서울로 이주를 하게 되어 세례 받을 기회를 놓쳤습니다. 물론 저의 후임자가 왔지만 저에게 세례를 받고 싶다 말해왔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미국에 공부하러 갔을 때, 그 할머니의 가족들이 세례를 받겠다고 저에게 연락을 했지만, 제가 없어서 세례를 받지 못하고 별세하셨습니다. 이런 경우 다른 목회자나 심지어 일반 평신도라고 하더라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무개에게 세례를 주노라.”고 세례를 베풀 수 있었습니다. 또 다른 경우는 사랑하는 가족이 세례를 받지 못한 가족을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특히 중세 이전의 서양 교회는 사제가 없는 교회가 많았고, 그 때문에 교리 공부를 다 마치고도 세례를 받지 못하고 별세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경우는 세례가 정말 간절히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가족들을 위해서 훗날 세례식을 베푸는 것이 용인된 듯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죽은 자를 위한 세례를 긍정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권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은 자를 위해서 산 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을까요? 성경이 말씀하지 않는 것은 고려할 수 있다는 신학자와, 성경이 말씀하는 것만 따라야 한다는 신학자 중에서 여러분은 어느 쪽이 더 나은 해석자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3. 오늘은 총선일 입니다. 저는 지난 10일 사전 투표를 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