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생명을 소생시키는 분입니다. / 고전 15:42-49.
묵상자료 6909호(2020. 4. 16 목요일).
시편 77:1-3.
찬송 91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생각 하나 이어갑니다. 가끔 내 안에 있는 모든 감각기관이 홍수 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너무 시끄럽고 너무 많이 보고, 너무 많이 먹고 너무 많이 말을 한 날인데요. 그러고 나면 오히려 뭘 듣고 뭘 봤고, 뭘 먹고 뭘 말했는지, 뒤죽박죽이 돼서 남는 게 없습니다. 하지만 빨리빨리 처리해야 할 게 많다보니, 거의 매일을 그런 상태로 보내는 것 같습니다. 마치 점심시간에 손님 가득한 식당 주방 옆에 앉아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손님들 떠드는 소리에, 주방에서 플라스틱 그릇들 요란하게 치우는 소리까지, 세상에 둘도 없이 맛있는 음식이라도,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입니다. 건강을 위해 단식도 한다는데, 혹시 감각에도 단식이 필요한 건 아닐까요? 더 풍부한 감각을 느끼기 위해서, 홍수 난 감각을 정화시키는 일 말이지요. 그럴 때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다비드 르 부루퉁이 <걷기 예찬>에 쓴 이런 방법을 시도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충분할 만큼 예민한 청각을 갖춘 사람이라면, 풀이 자라고 나무의 우둥지에서 잎이 펼쳐지고, 머루가 익고 수액이 천천히 올라오는 소리를 듣는다. 그는 흔히 소음과 분주함에 가려져서 느끼지 못했던, 시간의 떨림을 다시 감지하기 시작한다. 침묵은 계절을 탄다. 우리 고장에서는 1월의 눈 덮인 들판속의 침묵이 다르고, 8월 뜨거운 햇빛에 겨워 꽃과 잎이 폭발하고, 벌레들이 울어대는 한 여름의 침묵이 또한 다르다. 같은 풍경 속에서도 침묵은 날마다 제각기 다른 결을 보인다. 세상에는 낯선 소리나 수다스러운 말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장소들이 있다. 그런 곳에서는 사람의 개입과는 도저히 맞지 않는, 어떤 위태로운 균형이 유지되고 있어서, 그 균형을 깨트리지 않으려고 사람들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걷는다. 그곳에 어울리는 건 오로지 명상뿐이다. 숲이나 사막이나 산 혹은 바다에서는, 때로 침묵이 너무나 속속들이 스며들어 있어서, 다른 감각들은 상대적으로 시효가 끝났거나 무용한 것 같이 느껴진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8년 4월 20일 방송>
2. “육체의 부활(42-49절)”을 읽었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이야기 할 때마다 인류의 첫 조상 아담을 떠 올리게 됩니다. 아담이 육체를 가진 존재로 죽어 썩은 것을 환기시킵니다. 첫 아담은 육체로 와서 육체로 돌아갔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첫 번째 아담에 대해서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아담에 대해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두 번째 아담은 흙으로 만들어진 땅의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은 하늘에서 오신 존재였습니다. 이 둘의 차이를 성경은 “산 영과 살려주는 영”으로(개역), “생명 있는 존재와 생명을 주는 영”으로(공동번역), “살아 있는 영과 소생시키는 영”으로(KJV)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번역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첫 아담은 그 자신이 생명 있는 존재로 지어졌다고 하면, 둘째 아담인 예수는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존재로 지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어렵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의 몸을 가진 흙으로 지어진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생명을 주는 존재로 이해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엄청난 비약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창조를 설명하려는 것이나, 부활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역시 성경 말씀을 소환시킵니다. 성경에 기록한 대로(창 2:7) 그 말씀을 증거물로 믿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 신앙을 논리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신학자이자, 목회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자신의 이성으로 건너갈 수 없는 많은 장벽 앞에 멈춰 서야 했습니다. 그 때마다 그를 다시 일어서게 하고 움직일 수 있게 한 것은 성경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성경 말씀 앞에서 고개를 숙였고, 엎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성경말씀이 최후의 보루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성경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생각하지 않고, 이성과 논리로 성경을 증명하려고 기를 쓰는 분들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아멘 하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첫 걸음이라고 말입니다.
3. 묵상식구 최상준교수께서 국민일보에 기고하신 글이 있어 소개드립니다. <한 한국계 미국인의 탄원>으로,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4453111&code=61221311&cp=nv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