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율법의 가치 : 지키려 노력하는 것. / 출 20:1-21.

박성완 2020. 4. 30. 01:52

묵상자료 6923(2020. 4. 30 목요일).

시편 78:30-33.

찬송 21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남미의 가난한 동네로 봉사활동을 나갔던 그는 그곳 사람들을 위해서 배움의 자리를 마련하고 많은 것을 나누려 애썼습니다. 부녀교실에서는 요리와 미술 작은 예술 작품 만들기를 다른 동료들과 함께 가르치고 행려인 들에게 식사를 마련해 주는 <새 삶 센터>에서는 그들에게 따뜻한 식사를 마련하기 위해 장을 보고 그곳에서는 가장 흔하게 쓰이는 재료인 바나나를 따서 요리하고 식탁을 준비했습니다. 자원봉사 센터를 운영하는 분 얘기를 들어보니, 행려인 들이 씻을 수 있는 목욕탕을 처음에는 무료로 개방했었는데, 그들이 원하지 않아서 이제는 작은 돈 만을 받고 운영한다고 했습니다. 그냥 받기 보다는 무언가라도 대가를 지불하고 싶어 하는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있지요. 가난하지만 순수한 얼굴로 감사하며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보며 그는 많은걸 배웠습니다. 어느 날 봉사자들이 떠날 날이 가까워오자 그들은 나름대로 각자의 선물을 준비해 가져왔습니다. 커피 열매에 그림을 그려 만든 장식품, 자신이 키운 약재, 산에서 따온 꽃, 아주 사소하지만 마음이 담긴 것들이었는데요. 그 중에 한 사람이 봉사자들에게 다가와서 미안해하며 조용히 말하더랍니다. “저도 선물을 드리고 싶은데 선물을 가져올 수가 없어서 못 가져왔습니다. 저의 집에 한 번만 와주실 수는 없을까요?” 저녁 무렵 그가 데리고 간 작은 집의 뒤뜰로 나가니 해가지는 석양이 아름답게 그들을 비췄습니다. “저는 매일 우리 집에서 저 풍경을 볼 때마다 행복해 지는데 가져갈 수가 없어서요. 이게 바로 제가 드리는 선물이니 마음껏 누리고 가시기 바랍니다.”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그의 얼굴을 보며 봉사자들은 함께 행복해졌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봉사와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분의 말씀이 그의 귀에 오래도록 남아 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건 함께 있어주는 것이지요. 그들은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과연 누군가와 함께 있어 주고 있는가? 가족 친구 이웃 내 주변사람, 그리고 멀리 있지만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 어떤 이와 함께 있어주는 중인가? 생각해 보세요. 사랑은 공부하는 게 아니라 그냥 사랑하는 것이고, 봉사는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겁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6520일 방송>

 

2. “십계명을 받다(1-21)”을 읽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지켜야 할 율법은 모두 613개로, 모세 5경에 담겨져 있습니다. 창세기에 3, 출애급기에 111, 레위기에 247, 민수기에 52, 신명기에 200개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단연 금과옥조로 여기는 것은 오늘 본문인 십계명입니다. 그런데 이 십계명을 하나 둘 셋 하듯 번호를 매긴 것이 아니어서 기독교 내부에서는 혼란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것과 인간에 대한 것으로 분류되는데, 구교회는 3:7, 신교회에서는 4:6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열 개로 말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유대인의 숫자 개념으로 보면 3:74:6보다는 훨씬 의미가 있습니다. 십계명 역시 다른 성경의 말씀과 같이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그 중에 가장 다툼의 여지가 많은 것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제3계명, 혹은 제4계명 입니다. 소위 근본주의자들처럼 대부분의 개신교도들은 안식일 계명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이를 눈치챈 안식교도들은 주일이 아니라 안식일인 토요일을 지켜야 한다고 몽니를 부리고 있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본래의 제정 정신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후 이레되는 날 쉬셨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쉼의 참된 의미는 건강한 생명을 돌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안식일에 유대인들과는 달리 배고픈 제자들에게는 밀 이삭을 잘라먹는 것을 눈감아 주셨고, 당신 자신은 수많은 병든 자들을 정성껏 치료해 주셨습니다. 지금은 안식일의 중심부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으로 초점을 모으고 있습니다. 이른바 주일 성수로 바뀐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하신 날과 성령께서 강림하신 날이 안식후 첫날이어서 초대교회는 이 날을 기념하다가 마침내 안식일보다 더 중요한 날로 대치된 것입니다. 그런데 주일 성수의 참된 의미도 고려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드리는 예배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는 일, 곧 귀로만이 아니라 몸과 생활로 실천하는 일이야 말로 강조되고 강조되어야 할 대목이라는 말입니다. 오늘도 우리 설교자들은 행동하는 설교를 하지 않고 귀만 풍성하게 하는 설교로 만족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우리 한국 개신교회의 치명적 약점이 있습니다. 삶이 없는 신앙, 무슨 소용입니까?

 

3. 오늘은 저의 부친 54주기 추모일이지만, 사회적 거리두기에 참여 개별적으로 추모식을 갖기로 했습니다. 어제 소개한 프랑스의 수학자는 프왱카레(Poincare, J. H. 1854-1912)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